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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도 감탄한 측우기
측우기는 우리나라 수자원 역사에서 최대의 자랑거리이다. 세계 최초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비의 양을 측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했다는 것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1929년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하천조사서’에는 측우기에대한 일본인들의 감탄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지금부터 약 500년 전 현재와 유사한 우량계를 제작해 측우대를 경복궁 내 서운관에 세우고, 비가 올 때마다 주척으로우량을 측정하였다. 한편 각 도(道)와 각 읍(邑)에 같은 모양의 우량계를 설치했던 것은 실로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그 당시는 아직 서양에서조차 우량 관측이 없을 때였다.그리고 이러한 관측기록은 역대 왕조실록 일지 등에 기록되어 지금도 전해지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세종 때 시작한 우량관측 계통은 후세 전란으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워져 선조 19년(서기 1586년)에 기록을 남기고 이후 160년간 관측이 중단되었다. 그 후 제19대 왕 영조시대에 이르러 세종의 우량계를 모방해 측우기를 제작하여 팔도에 설치하고 우량 관측을 재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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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점의 둔보 축조
둔보는 1636년(인조 21년) 경 사리원 북쪽 정방산을 거성으로 한 김자점(金子點)의 청탁에 따라 세워졌다. 구전에 따르면 김자점은 원래 김자점(金自點)이라 칭했는데 평안도 출신으로 타고난 성품이 민첩하고 영민하였다. 처음에 안주병사로 임명되었다가 후에 평안감사에 올랐는데 전술에 능해 중종 때 변방의 외적을 막아 공을 세우면서 승진을 거듭해 부원사에 올랐다가 인조에게 신임을 받아 왕의 만년에 재상에 올랐다. 그러나 효종시대에 이르러 송시열에게 자리를 빼앗겨 유배를 당하였다. 마음 속 깊이 효종을 원망하던 김자점은 결국 모반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효종 2년에 처형되었다.
김자점이 이전에 정방산성에 있을 때 성 아래 망망한 간척지와 수만의 물짐승 떼들을 보면서 이곳을 개척해 배수 관개를 편리하게 하면 드넓고 기름진 논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하룻밤은 참모장교들을 데리고 강에 배를 띄워 잔치를 베풀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이 되기 전에 미리 강바닥에 던져둔 냄비를 올려 그 안에 가라앉은 진흙 두께를 재어 침전도를 알아냈다. 그리하여 군신들을 모아놓고 옷깃을 세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몽을 꾸었다. 꿈에 신선이 나타나서 나를 향해 저 갈대밭을 개척하면 만경(萬頃)의 기름진 밭을 얻을 수 있다. 방수 관개의 규구(規矩)는 신마(神馬)의 발자국이 있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신선의 말에 따라 수리를 강구하고 갈대 대신에 벼를 심고, 기러기나 게 대신에 사람과 가축을 거주시키겠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지역의 인부를 모으고 죄인들을 부역시켜 토목공사를 시작하였다. 강의 동안(東岸)에 펼쳐진 갈대밭에 대방수제를 두르고, 강의 지류인 서흥강의 하류 종암을 정리해 석언제(石堰堤)을 세웠으며 거기부터 구불구불한 길 5리를 보로 이었다. 그 관개가 이르는 곳은 봉산군 서종, 영천, 만천, 사인의 4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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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원종합개발의 반석-이문혁 국장
이문혁 국장은 경북 영일군 기계면에서 태어나 일본대학 공과전문부 토목과를 졸업하고 경상남도 건설과장, 내무부 토목국 이수과장, 건설부 수자원국 이수과장, 울산개발계획본부 공공시설국장, 건설부 수자원국장과 울산특별건설국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7월에 제2대 수자원국장으로 부임할 당시에 주요 사업으로 치수사업 외에 춘천댐, 섬진강다목적댐, 남강다목적댐, 동진강 간척 등 혁명정부의 간판 격인 국책사업들이 큰 정책 비중을 가지고 추진되었다. 이문혁 국장은 우리나라의 수자원 개발사업이 경험과 기술 면에서 미숙한 가운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추진되는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다. 그는 우리 힘으로 건설된 최초의 댐인 춘천댐과 일제강점기에 착공되었다가 중단된 섬진강다목적댐의 완공, 당시 최대규모였던 동진강 간척공사 추진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이문혁 국장은 당시 불모지 상태에서 수자원종합개발의 기틀을 만들어 현안 국책사업과 함께 신설 수자원국의 시급한 업무였던 향후 수자원종합개발의 정책 수립과 개발의 기틀을 공고히 다졌다. 이를 위해 수자원종합개발10개년계획을 성안해 수자원 개발의 장기 비전과 정책목표를 정하고 중요 하천 유역의 기본조사로 4대강 유역조사를 시행했으며 「특정다목적댐법」, 「한국수자원공사법」, 「풍수해대책법」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또한 상공부와 한국전력(주)의 발전전용댐 건설 주장에 밀려 소양강댐이 다목적댐으로 개발되지 못하는 난관에 봉착하자, 「특정다목적댐법」이 유명무실해지고 향후 다목적 수자원 개발의 전망이 매우 암울한 상황에 처하게 됨을 우려해 대통령비서실에 소양강댐의 다목적 개발이 국가백년대계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면서 이를 대통령께 보고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께 직접 설명한 결과 건설부의 주장이 관철되어 소양강댐의 다목적댐 건설이 결정됨으로써 그 이후 다목적댐 시대가 개막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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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법」 제정 배경
1992년 9월 건설부장관이 수자원국장에게 “대통령께서 지하수에 관심이 많으시니 급히 「지하수법」을 제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당부를 하였다.
그 당시 4개 부처에서 「지하수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었다. 동력자원부는 지하수가 지하자원이라는 이유로, 환경부는 지하수의 수질관리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이유로, 내무부는 지하수를 온천과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이유로 각기 자기들 소관업무라 했으며 그 중 동력자원부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건설부는 약 2개월에 걸쳐 「지하수법」 초안을 완성한 후 전문가들을 모아 합동 검토·토론회를 거쳤는데, 그때 참석한 전문가 중 한 사람이 동력자원부에 건설부가 「지하수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동력자원부에서 먼저 「지하수법」(안)을 성안해 부처 간 협의를 보내왔다. 건설부에서는 전문가 토론회를 거친 후 「지하수법」(안)을 마련해 내부결재 과정에 있는 단계였다.
동력자원부에서 보내온 부처 협의요청 공문을 보고 서둘러 건설기술관리실장·차관·장관에게 상황보고를 한 후 그 날로 장관 결재를 받아 총리실에 가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동력자원부가 진행 중인 「지하수법」(안)의 부처 간 협의를 보류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① 건설부도 「지하수법」(안)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부처 간 협의를 보내게 되면 국민과 언론에서 부처 간 밥그릇 싸움으로 보아 여론이 매우 나쁠 것임
② 건설부는 부처 간 협의를 보내지 않을 것이니, 이미 동력자원부가 진행 중에 있는 부처 간 협의를 총리실에서 보류시킨 후 총리실 주관 하에 부처 간 조정을 거쳐 정부의 통일된 입장을 정하는 것이 타당함
결국 총리실에서 건설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각 부처에 공문을 보내 동력자원부의 부처 간 협의 진행을 보류시킨 후 총리실 주관으로 조정하였다. 그 결과 동력자원부는 지하수 탐사에 대한 업무만을 관장하고, 건설부가 종합적인 지하수 정책을 포함한 모든 지하수 관련 업무를 담당하도록 결정되어 결국 건설부에서 「지하수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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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관리기본법」 제정 무산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 공약으로 제시한 물 관리 일원화에 대해 2003년 지속가능발전위원회(PCSD) 주관으로 재검토한 결과 2005년 10월 19일 국정과제 회의에서 국가물관리위원회 설치안을 최종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환경부, 건교부 공동으로 「물관리기본법」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2006년 6월 「물관리기본법」을 국회에 제출하기 직전에 환경부 장관을 지냈던 한명숙 총리가 환경부로 물 관리를 일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재논의를 하기 위한 청와대 업무조정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결정된 사항을 재논의하는 것에 대해 질타했다고 한다.
「물관리기본법」이 국회에 제출된 후 당시 환경부장관은 2006년 11월 28일 환경노동위원회에 참석해 국가 물관리위원회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며, 수량과 수질은 한 부서에서 통합 관리하되 환경부 쪽으로 물 관리 일원화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등 합의된 「물관리기본법」을 부정하였다. 환경단체, 국회 환경노동위 등도 이에 공조해 「물관리기본법」은 심의조차 되지 못하고 2008년 5월 17대 국회 종료에 따라 자동 폐기되었다.
※ 출처 : K-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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