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전북 남동부와 전남 북동부를 흐르는 강.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 자락의 옥녀봉 아래 데미샘에서 발원하는 강입니다. 총길이는 225.3㎞, 유역면적은 4,896㎢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를 흐르며 보성강, 요천 등의 여러 지류와 합쳐져 광양만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강 유역에는 임실·남원·곡성 등의 분지가 있지만 평지는 드문 편이며, 강이 좁고 물속에 바위가 많아 가항거리는 39㎞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수력자원은 비교적 풍부한 편이며 섬진강 본류의 섬진강 댐과 수력 발전소와 지류인 보성강의 유역변경식 발전소가 있습니다.


1. 유래

원래 섬진강은 ‘가람 사수강’·‘사천’·‘두치강’ 등으로 불렀는데, 고려 우왕 11년에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어, 이때부터 강 이름에 두꺼비섬(蟾), 나루 진(津) 자를 붙여 섬진강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천지리학자인 이형석 씨의 조사에 의하면 섬진강은 단군 때는 ‘모래가람’, ‘모래내’라 불리다가 그후 ‘다사강(多沙江)’, ‘대사강(帶沙江)’이라 불리웠으며 이후 ‘두치(豆恥, 豆置)’강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2. 역사


1) 선사시대

섬진강 주변의 구석기 문화는 섬진강의 큰 지류인 보성강 주변의 유적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순천과 월평의 구석기 유적은 10만년에서 1만년에 해당하는 중기, 후기 구석기 문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순과 순천의 구석기 유적으로 볼 때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섬진강 유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섬진강 유역에서는 아직 신석기 시대 관련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섬진강 주변의 자연 환경으로 볼 때 신석기시대에는 보다 넓은 지역에서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주변지역과 문화교류를 하면서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섬진강 유역의 청동기 시대 유물을 살펴보면, 한반도의 서해안 지역과 동해안 지역의 문화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 일찍부터 문화의 복합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지석묘가 전남 지역에만 2만여 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구례군 봉서리와 순천시 우산리에서도 고인돌을 찾아볼 수 있으며, 순천에서는 집터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전남 지역의 철기 문화는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며 기원 후 3세기 후반까지 지속됩니다. 중부권의 마한은 3세기 말까지 활동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에는 백제의 세력에 밀려 남부지방으로 밀려 내려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섬진강 주변은 이 시기에 마한과 변한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관련 유적으로는 순천연향동의 유적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의 남원은 가야 시대에 기문국이었으며, 현재 남원의 가야 관련 유적은 상백리, 월산리, 백천리 고분군이 있습니다.


2) 삼국시대

삼국시대 초기에는 섬진강 유역은 마한과 변한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데, 섬진강 유역이 언제 백제 영역에 편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백제가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활발한 정복사업으로 전남 남해안 지역에 이르고, 무령왕 대에는 섬진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으며, 무왕 대에 와서는 섬진강 유역 전체가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그 후 신라의 삼국통일로 섬진강 유역은 신라의 영역이 되어 9주 5소경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완산주에서 무진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신라의 전제 왕권이 무너지고 각 지방에 호족세력이 성장하였는데, 이때 섬진강 유역은 견훤이 무진주에서 시작하여 전주로 옮겨 후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보아서 무진주 관내에 있던 전라도도 후백제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섬진강 유역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으로 양국 간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지역이며, 후삼국시대에는 견훤의 후백제가 점차 영토를 확장하며 신라와 고려를 상대로 하여 접전을 벌이던 지역이었습니다.


3) 고려시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새로운 시대를 연후 섬진강은 이질적인 체제가 집단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라 융화와 교류의 교차로였어야 하지만, 섬진강 유역에서 그러한 개방성이 두드러진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앙 정부와의 지리적인 거리만큼이나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지역적인 독자성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섬진강 유역에 자리 잡은 고을들을 살펴보면 지사부에 해당하는 남원을 제외한 거의 전부가 속현이거나 속군이었습니다. 이것은 지역적인 영세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면 그만큼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지방 토착세력의 뿌리 깊은 존재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고려 말 섬진강 유역은 왜구 침입의 피해를 많이 받은 지역입니다. 왜구의 약탈행위는 전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남해안 지역이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였으며, 곡창지대이자 조운의 통로에 위치해 있던 서해연안 지역이 또한 주요한 약탈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조운의 통행로가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해안보다는 서해안이 왜구의 약탈을 더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같은 곡창지 대권에 놓여 있었던 섬진강 유역은 남해안이나 서해안을 통하여 침입해 오는 왜구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4) 조선시대

섬진강 유역은 삼국시대부터 군사?지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대로, 중·하류 유역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서 양국 간의 영토싸움이 치열했던 곳이며, 고려 때는 해로를 통해 왜구의 침략이 매우 잦았던 지역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중에도 섬진강 유역은 국가의 중흥기지인 호남지방의 보전여부가 곧 섬진강 연안의 제읍(諸邑)의 보전여하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전략상 절대적인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시 전라도에서 있었던 최초의 전투는 섬진강 상류지역에서 전개되었는데, 임진년 6월 하순에 임실 운암계곡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그 것입니다. 이 전투는 양대박 휘하의 남원 의병이 거둔 승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극복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전이었습니다.

정유재란은 일본군의 전라도 침략전쟁으로 규정해도 좋을 만큼 적으로부터 호남지방 전역이 철저히 유린되었습니다. 임진란 제1차 침략전쟁의 패인이 호남 의병과 수군 때문이었다고 판단한 일본 측의 재침 목표가 먼저 전라도를 공략하는 것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호남지방의 전쟁피해는 매우 컸습니다. 특히 섬진강 하구에 상륙한 적의 대군이 연안을 따라 상류지역으로 북상하면서 시작된 온갖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조선후기는 농민항쟁의 시대였습니다. 섬진강 유역에서도 다른 삼남지방과 마찬가지로 1862년부터 농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섬진강 유역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으로 순천과 광양의 농민항쟁이 있고, 그밖에 진안, 장수, 임실, 남원, 운봉, 구례, 옥과, 곡성 등 섬진강 유역의 거의 모든 군현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섬진강 유역의 농민들은 수령과 이서배의 부정과 탐욕에 과감히 맞서 투쟁하였습니다.


5) 근 · 현대시대

조선은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근대사회로 이행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양반 지배체제의 모순이 극대화됨으로써 민란이 빈발하였으며, 밖으로는 국제주의 열강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1984년 동학농민혁명의 물결은 섬진강 유역에도 거세게 일었는데, 임실에서 하동의 화개에 이르기까지 농민군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원과 순천·광양 지역에서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였습니다. 농민군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인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하고서 전라좌도를 통치하였으며 김개남의 핵심인물인 김인배는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두고서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섬진강 유역에서도 반일 의병전쟁이 전개되었습니다. 1870년 후반 이후 약 2년 동안 의병투쟁은 가장 격렬하여 전쟁이나 다름없었으며, 의병투쟁 후기에는 전라도 의병활동이 가장 왕성하였는데 섬진강 유역도 그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기미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 지역을 원의 불길처럼 번졌습니다. 섬진강 유역의 경우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조직을 통해 서울에서 전주로, 다시 전주에서 진안, 장수, 임실, 남원, 구례, 순천, 광양, 여수 등지로 전달되었습니다. 만세시위는 섬진강 상류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나 하류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더욱 거센 물결을 만들면서 퍼져 나갔습니다. 일제의 패망으로 식민지 조선은 해방되었지만, 38선을 경계로 한 분단이 민족을 갈라놓게 됩니다. 섬진강 유역은 분단으로 인한 좌우 갈등이 격심한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의 분단으로 인한 상처는 1948년 10월에 일어나 이른바 여순사건에서 극에 달하였습니다. 여순사건은 여수에 위치한 14연대 장병들이 제주도 4?3항쟁 진압을 거부하며 일으킨 군인폭동이었습니다. 여기에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인근 지역주민들이 합세함으로써 내란의 소용돌이를 일으켰습니다. 이후 섬진강 유역은 빨치산 투쟁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는데, 빨치산의 지리산 유격지구는 남한지구 유격대의 총 본산이라 할 수 있으며 남로당의 거물인 이현상이 관할하면서 북으로 무주 덕유산, 남으로 광양 백운산을 연결하며 활동하였습니다.



[섬진강 모식도]


3. 문화

섬진강 유역은 험준한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세계와의 왕래가 크지 않아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였습니다. 또한 섬진강 유역은 역사시대 이래로 동서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세력의 영토 쟁탈의 대상이 됨으로써 수많은 전란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동서의 대립보다는 문화적 연결교량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역대 중앙권력의 주변지역이었기 때문에 지배층의 문화가 미친 영향이 적기 때문에 낙동강 유역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양반문화의 흔적이 적고 도시의 발달이 더딘 반면 토착세력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큽니다. 따라서 섬진강 유역의 경우에는 피지배계층 문화의 잔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섬진강 유역은 근대 산업화과정에서도 소외되어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여전히 농업에 대한 의존이 크며 자본주의의 상업화에 예속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출처] 섬진강-영산강유역조사보고서(2006, 국토교통부- 한국수자원공사)




목록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