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전남 담양군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흘러드는 강

영산강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젖줄로서 담양 지나 광주·나주·함평·영암·목포를 지나 황해로 흐르는 강입니다. 황룡강과 광주천이 광주에서 합류하고 지석천이 나주에서 함평천·고막원천 등이 함평에서 합류합니다. 길이는 115.5Km이며, 유역면적은 3,371㎢입니다.

영산강의 발원지는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용연리에 있는 가마골의 용소입니다. 강의 길이로만 보면 황룡강의 상류인 병풍산 용흥사 계곡에서 발원하는 북하천이 더 깁니다. 또한 담양호를 지나 담양댐부터 담양읍 경계까지 지방하천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담양읍부터 영산강하굿둑까지 국가하천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 유래

영산강의 원이름은 금강진(錦江津: 일명 금천)이며 고려시대부터 배류하는 3대강이라 불리어 왔습니다. 지금의 나주시인 영산포는 수륙교통의 요지로 에로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져 ‘강물이 영산포구를 지나 흘러 내려간다’는 뜻으로 나주에서 영산포까지를 영산강이라 부르게 된 것이 강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산강의 중류에 위치한 나주의 이름은 통일신라 때 금성이라 불렀는데 이러한 연유로 나주시를 통과하는 강 이름을 금천 또는 금강이라 부르고 강을 건너는 나루터를 금강진이라 하였습니다. 조선 초기 때 영산포에 조창을 두고 창성을 쌓아 나주를 비롯한 16군현의 전세를 모아 이곳에서 한양으로 운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번창한 영산포의 명성으로 인하여 금천, 금강, 금진강에서 영산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영산강 명칭의 경우 본류와 지류에 따라 수십 개의 명칭이 기록(대동여지도 등)에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나주 동쪽 상류는 광탄강, 영산포 부근은 남포강 · 영산강, 함평 쪽은 사호강, 더 남쪽으로 무안 쪽으로 내려와서 곡류하는 지역은 곡강이라고 불렀습니다. 호남의 내륙을 관통하는 영산강은 예로부터 이 지역 수운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조창 가운데 하나인 영산창이 영산포에 설치되었습니다. 영산창은 조선 전기 9개의 지방창고 가운데 하나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 일대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고, 그래서 그 주변의 강 이름을 ‘영산강’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2. 역사


1) 선사시대

영산강 유역의 구석기 문화는 광주 치평동 유적, 광주 산월 유적, 광주 매월동 유적 등 영산강 중류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바 있으며, 신석기문화는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신석기시대 전기에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은 대체적으로 석실 주변 등에서 생활용품들이 출토된 반면에 보성강, 남해안 지역에서는 석실 내의 부장용과 석실 주변의 실용품들이 출토되고 있어 양 지역 간 문화적인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영산강유역에서는 화순 대곡리, 함평 초포리 석관묘에서 세형동검 등 청동기기 일괄로 출토되고 또 장천리 지석묘에서 세형동검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세형동검문화가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삼국시대

영산강유역의 원삼국시대인들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면서 수렵, 어로생활을 부업으로 대단히 높은 경제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백제가 영산강유역에 대한 진출을 처음 시도했던 것은 4세기 후반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4세기 후반 백제가 왜와 함께 가야 지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가하여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교역권을 확보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남해안을 따라 해남지역을 공격, 점령하여 영산강유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침투를 위한 거점을 확보하였습니다. 이것이 백제의 영산강 유역 진출의 첫 시도였습니다. 이후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면서 영산강 유역을 차지하고 6세기 중 · 후반에는 5방제중 지금의 영산강 유역이라 할 수 있는 남방으로 편제되어 신라에 멸망 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6세기 말 영산강유역은 남방을 폐지하고 나주지역에 발라주를 두어 편제하더니 신문왕 6년에 발라주를 발라군으로 강등시키고 광주지역의 무진군을 무진주로 숭격하여 영산강유역 편제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통일신라는 대외교류의 측면에서 서남해안 지역을 중시하였으며, 신라하대 영산강유역은 해상활동이 활발하였습니다.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새로운 세력이 대두하였으며 당에 유학하는 선승들이 이곳을 출발점이자 기착점으로 삼으면서는 새로운 선종승려와 유대를 맺는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이 지역을 통해 대중국의 외교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산강유역에는 많은 농경지가 분포되어 있어 농업생산에서도 비중이 큰 지역이었습니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나주목을 중심으로 2개의 군현으로 편제되어 무인시대까지 운영되다가 무인시대에는 대몽항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로 외세에 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 말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되고 난 뒤, 영산강유역은 비교적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의 중앙정계 진출은 영남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는데, 그 이유는 왜구의 잦은 침입 때문이었습니다. 왜구의 침입은 충정왕 때부터 고려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읍치를 내륙으로 이동하여 역사 문화가 크게 단절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영산강유역이 나주를 중심으로 주변 속현을 다스리는 형태를 취하였는데 이는 나주가 정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평가됩니다. 조운제도 역시 법성창과 함께 나주 영산창이 주변지역의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영산창은 영산강을 경계로 종남부의 군현들이 배속되어 있고 법성창에는 영산강의 서북부지역 군현들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창은 후기에 들어와 약간의 변동을 겪는데 나주의 영산창이 수로가 험하여 법성창에서 영산창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있었던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시는 영산강유역의 많은 군관민이 합심하여 왜적을 물리쳐 지역을 방어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는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의 항쟁이 자주 일어났으며, 이 중 동학혁명의 발생지가 영산강 유역입니다.


5) 근 · 현대시대

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의병활동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3.1운동 및 광주학생운동사건 등 주요한 항일투쟁 및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는 저항이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일찍 일어난 지역이기도 합니다. 또한 노동운동, 사회운동 등의 대주운동이 활발하여 지역민 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좌 · 우익의 대립이 가장 극심한 지역이었으며, 근대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지역이기도 합니다.



[영산강 모식도]


3. 문화

영산강은 전남의 나일강이라 부르기도 하며 북부의 담양에서 시작하여 서남지방을 종류하면서 그 주변에 일찍부터 찬란한 문화를 배양했고 이 지역을 우리나라 제일의 쌀 생산지로 만들었습니다.

한민족이 오랜 이동 끝에 안식처로 자리잡은 이 지역은 기름진 옥토와 온화한 기후, 수려한 산천을 두루 갖춘 천혜의 보금자리였으며 일찍부터 찬란함 문화를 꽃피워 왔습니다. 특히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한국의 근 · 현대사에서 영산강유역은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영산강유역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보고로 많은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고 있으며 많은 전승문화를 간직하여 우리문화의 참모습을 살피는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출처] 섬진강-영산강유역조사보고서(2006, 국토교통부-한국수자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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