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영남지방 전역을 유역권으로 하여 그 중앙 저지대를 남류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하천

낙동강은 한반도에서 압록강 다음으로 긴 강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강원도 태백시의 함백산 동쪽에 있는 작은 저수지인 황지연못에서 발원하는 이 강은 태백시에서는 황지천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낙동강은 대구분지를 지나 부산 서쪽에서 분류되어 남해로 흘러 들어가며, 길이는 510㎞이고 유역 면적은 23,384㎢입니다.

옛날에는 내륙지방의 교통 동맥으로 되어 하안에는 하단·구포·삼랑진·수산·남지·현풍·왜관·낙동·풍산·안동 등의 선착장이 발달되었으며 가항거리는 343㎞나 되었습니다.

낙동강의 발원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강원도 태백시에서는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편을 근거로 '황지연못'을 낙동강의 발원지로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 현지답사를 통하여 '너덜샘‘을 발원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1. 유래

낙동강은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황산강’, ‘황산진’, ‘가야진’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역사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낙수’, ‘낙동강’이라 하였습니다. 황산이란 이름은 지금의 양산시 물금읍에 있던 황산나루에서 유래한 것으로 삼국시대에 신라의 수도 경주와 가락의 중심지 김해 사이에 교류가 성했던 곳입니다.

낙동강은 가락의 동쪽을 흐르는 강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 가락은 삼국시대에 가락국의 땅이었던 지금의 경상도 상주 땅을 가리킨다. 상주의 옛 이름은 낙양이고, 낙양의 동쪽을 흐른다하여 낙동강이라 불리었습니다. 조선시대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 ‘지리전고’편에 “낙동은 상주의 동쪽을 말함입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2. 역사


1) 선사시대

낙동강유역에서 사람이 활동한 가장 오랜 흔적은 중석기 또는 세석기라 불리는 문화단계입니다. 이는 낙동강유역 내에서 정착이나 취락 형성이 시작되는 신석기시대보다 앞서는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 유적, 칠곡군 석적면 중리 유적,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유적 및 거창군 남상면 임불리 유적 등이 있습니다.

낙동강 유역의 선사문화는 신석기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체로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는 시베리아를 거쳐 두만강으로부터 들어왔으며,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로 대표되는 빗살무늬토기는 압록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서남도서, 두만강 등의 6개 군으로 나누어집니다. 낙동강유역에서 발견된 주요 신석기문화 유적은 부산 동삼동 유적, 부산 금곡동 율리 유적, 부산 다대동 유적, 부산 영선동 유적, 부산 암남동 유적, 울주군 서생 유적, 김해 수가리 유적, 김해 농소리 유적, 산청 강누리 유적, 청도 오진리 암음 유적, 김천 송죽리 유적으로 대표됩니다.

낙동강유역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 이후 신석기시대 문화가 소멸하면서 전개되는데, 이 시기에 생활터전은 해안이나 큰 하천의 사구지대에서 하천상류의 내륙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낙동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주요 유적은 대구 월성동 주거지 및 유물 산포지, 대구 연암산 유적, 대구 침산동 유적, 대구 괴전동 유적, 대구 이천동 지석묘군, 고령 양전동 유적, 거창 대야리 유적, 합천 저포리 유적, 창녕 유리 지석묘, 진주 대평리 유적, 진주 신당 · 덕오리 유적, 김해 내동 지석묘, 창원 덕천리 유적 등이 있습니다.

낙동강유역에 자리 잡은 무문토기인들의 문화를 살펴보면 중국 화북지방이나 남방의 먼 해외에서 직접 이주해 온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주로 한반도 북부 요동지방이나 중국의 동북지방 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던 종족이 남으로 이주하여 낙동강유역 일대 여러 곳에 정착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철기시대에는 철기문화와 병행하여 삼한이 형성되는데 대체로 마한이 경기, 충청, 전라남도 지방을, 진한이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방, 변한이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방을 각각 차지하였습니다. 낙동강 유역의 변한과 진한 지역은 1세기 무렵부터 상당한 수준의 철기시대를 맞게 되는데, 울산과 동래 지방의 제철유지 등이 철기시대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김해 등지의 김해식 토기와 사천, 진주, 고성, 밀양, 동래 등지의 패총, 지석묘, 옹관묘 등에서 출토되는 석검, 철검 기타 철제 유물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김해 패총 등에서는 탄화된 쌀알이 나와 이미 저습한 충적평야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특히 낙동강 하류지역은 남쪽 바다를 끼고 있어 해륙교통의 요충지였고 또한 비옥한 충적평야와 이어져 있어 농경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이런 삼한사회에 있어서 낙랑, 대방군으로부터 대륙의 금속유물도 낙동강유역을 통해서 수입되어 진한과 변한의 부락국가를 개방시켰습니다.


2) 삼국시대

낙동강의 동쪽에 자리 잡은 신라는 진한의 12개 소국 중의 하나인 사로국이 주위의 작은 집단들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혀 나가면서 실질적인 왕국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지증왕과 법흥왕 연간에는 불교를 국교로 수용하는 등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진흥왕 대에 신라는 국력이 강해져서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가야를 복속시키며, 북으로 원산만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후 계속되는 백제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중국의 당나라와 손잡고 양국을 공격, 삼국을 통일하여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확보하였습니다.

가야는 낙동강 중?하류의 기름진 땅에 자리 잡은 변한 12국이 모체가 되어 6~7개의 독립적인 가야 연맹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대표적인 소국은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령의 대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및 고성의 소가야 등이 있으며 전기에는 금관가야가 맹주국 이었으나 후기에는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국이 됩니다.

신라와 가야는 선사시대 이래로 같은 문화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양국의 문화는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는 삼국처럼 왕권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대가야의 멸망을 끝으로 신라에 병합되었습니다.

삼국통일로 커다란 영토를 지배하게 된 신라는 685년 새로운 지방행정구역으로 9주5소경 제도를 채택하였습니다. 9주 가운데 낙동강 유역은 사벌주(상주), 삽량주(양산), 강주(진주)의 3주로 나누었습니다.


3) 고려시대

후삼국의 혼란기에 대구지역은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역사상 유명한 동수대전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는 태조부터 5대 경종까지 과도기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금유와 조상이라는 관리가 징수목적으로 각 지방에 파견 나오는 반자치적인 형태를 유지해왔으나, 성종 2년 때부터 중국의 관제를 바탕으로 전국을 12목으로 나누고 상주관인 목사를 내려 보내 지방의주, 군, 현 내의 향직을 감독하는 반관반민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영남에는 상주목과 진주목을 두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습니다. 이어 성종 14년)에 2차 행정 대개편을 착수하고 주군의 병기몰수 및 사병금지 등의 조치로 무장해제 시켰으며 지방호족들의 권력을 말살했습니다. 이시기에 경상도는 상주지방에 영남도, 김해에 영동도, 진주에 산남도를 두었습니다.

고려 말 부산·경남지방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심하였습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략을 격퇴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침략금지를 요청하는 동시에 해변의 주요지역의 군?현에 성보를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고, 종래 황폐하였던 동래읍성을 개축하게 되었습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영산강유역이 나주를 중심으로 주변 속현을 다스리는 형태를 취하였는데 이는 나주가 정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평가됩니다. 조운제도 역시 법성창과 함께 나주 영산창이 주변지역의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영산창은 영산강을 경계로 종남부의 군현들이 배속되어 있고 법성창에는 영산강의 서북부지역 군현들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창은 후기에 들어와 약간의 변동을 겪는데 나주의 영산창이 수로가 험하여 법성창에서 영산창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있었던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시는 영산강유역의 많은 군관민이 합심하여 왜적을 물리쳐 지역을 방어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는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의 항쟁이 자주 일어났으며, 이 중 동학혁명의 발생지가 영산강 유역입니다.


5) 근 · 현대시대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독점적인 지위를 갖게 된 일본은 동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내정을 실질적으로 관장하였습니다. 1906년 2월에 일본의 이사청 설치로 부산은 이사관이 부산의 일본영사와 동래감리와의 사이에 사무인계가 이루어졌습니다.

갑오개혁(1894년) 때까지 대구는 경상도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지방의 중추기능을 계속하여 수행해 왔고, 1895년 도(道)제도는 폐지되고 중앙에서 전국 23부를 바로 관할하게 되어 대구부 관할의 대구군으로 개칭되었으나 부청소재지로서 그 관할구역과 지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1914년에는 다시 부제를 실시했으나 시가지 일대만 대구부로 독립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대구는 항일저항운동의 거점으로서의 역할 수행과 근대적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 곳입니다. 1907년에는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 절미로 되찾으려는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한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는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민족항쟁의 본거지로서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해외 귀환 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급격한 인구증가가 이루어져 부산과 대구는 대도시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25동란 때에는 낙동강이 최후 방어선이 되었고 부산은 임시수도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9.28수복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대동맥 역할을 담당하여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낙동강 모식도]


3. 문화

영남이라는 단어는 과거 서울에서 충주를 거쳐 소백산맥의 조령을 넘어 문경, 영주로 들어서는데 조령의 령을 따서 그 남쪽을 영남이라 하였습니다. 소백산맥은 서남으로 뻗어 내려 영남지방과 중부 및 호남지방 사이에 자연적인 장벽을 이루었고 이러한 경계는 이 지역을 고립시키고 지리적 사정에 의한 지역적 현상으로 옛날부터 현재까지 방언도 그대로 남아 있게 하였습니다.

낙동강은 영남 문화의 젖줄인 동시에 한반도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으며,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각 지류의 유역마다 과거로부터 개성 있는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여 왔습니다. 낙동강 지류 유역의 역사들은 선사시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남 문화 형성에 거점이 되어 왔습니다.

고대에 낙동강의 동쪽은 고신라, 서쪽은 가야 제국의 기반이 된 지역으로서 낙동강 대·소지류 유역의 수많은 분지는 고대 가야 제국을 발달시켰고 경주 분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대 문화는 찬란한 통일 신라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고려왕조는 중세 문화의 주축을 이루는 인재 양성의 문화력을 신라 문화에서 계승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다”라는 말과 같이 영남은 ‘인재의 부고’로서 이 지역 출신들이 정계와 학계를 주도하여 왔습니다. 낙동강은 태백 · 소백산맥에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이며, 북, 서부의 태백 · 소백산맥과 팔공산, 금오산에 둘러싸인 낙동강 상류분지는 안동, 상주, 선산 등 고읍들과 상업도시 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금호강 유역의 대구 분지는 대구, 고령 등 역사와 문화의 중심 도시였으며, 합천 분지는 황강 유역에 위치하여 고대 대가야의 꽃을 피웠습니다. 또한 남강 유역의 진양, 함안 분지는 경남의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역사도시인 진주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분지들은 각기 개성 있는 지역 문화를 꽃피웠고 동시에 영남문화의 복합성 및 다층성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출처] 낙동강유역조사보고서(2004, 국토교통부-한국수자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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