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북도를 거쳐 강경에서부터 충청남도·전라북도의 도계를 이루면서 군산만으로 흘러드는 강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의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무주·금산·영동·옥천·보은·청주·대전·세종·공주·청양·논산·부여·서천을 지나 군산만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약 402km의 강입니다. 금강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하여 '호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금산군에서는 '적벽강', 부여군에서는 '백마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금강의 주요 지류로는 갑천·논산천·미호천이 있고, 비옥한 호서평야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대전광역시 금강 유역에 대청댐이 있고, 하류에는 금강하구둑이 있습니다. 금강은 대전·충청권의 주요 생활·산업·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으며, 과거에는 수로 교통이 발달하여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번성하였습니다.


1. 유래

예로부터 금강은 비단처럼 아름답다 하여 錦江(비단강)이라 하였으며 그 물줄기를 따라 구간마다 다른 명칭으로 불리워 왔습니다. 「택리지」에 의하면 영동군 일대는 ‘심천’, 옥천군 일대는 ‘적등강’, 공주 부근을 ‘웅진강’, 그리고 그 아래를 ‘백마강’, ‘강경강’, ‘진강’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서」에는 금강을 ‘웅진강’이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의 명칭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상류로부터 ‘적등강’, ‘호강’, ‘차탄강’, ‘화인진강’, ‘말흘탄강’, ‘형각진강’으로 되어 있으며,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그리고 하류에서는 ‘고성진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동군 일대를 흐르는 강물을 심천 또는 지푸내라 부르는데 이곳은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는 지점으로 교통의 요지입니다. 부근에 초강과 심천유원지가 있습니다. 적등진은 옥천과 영동의 중간에 위치한 나루터로 영남지방과 호서지방을 잇는 길목이며 추풍령을 넘고 금강을 건너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2. 역사

1) 선사시대

금강의 구석기 시대 유적은 공주 석장리 유적으로 대표됩니다. 공주석장리 유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의 금강 북안에 자리합니다. 석장리 유적은 지금부터 약 13만~30만 년 전의 전기 구석기로부터 중기, 후기 구석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층이 발견되고 있어 구석기시대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금강 유역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강유역에서 조사된 몇몇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위치한 입지조건을 보면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여겨져 왔던 바닷가나 큰 강가보다는 강을 따라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상류지역이나 샛강 옆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유물을 보면 금강을 중심으로 터전을 잡고 살았던 당시의 사람들은 신석기시대의 비교적 늦은 시기에 이곳에 머무르면서 살림을 꾸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금강유역에서의 청동기 시대와 관련된 유적은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유적 또는 주거지를 비롯한 생활유적과 무덤유적 등 그 내용이 상당히 다양하고 분포지역도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은 금강유역에서는 물론 남한지역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의 최대 유적으로 전기와 후기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유적이며, 중서부지역에서 발생한 독특한 청동기 문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삼국시대

삼한 소국의 하나로 출발한 백제가 처음에는 한강유역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다가 475년에 지금의 공주 지역인 웅진성에 새로운 국가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웅진에 천도한 백제는 동성왕 대에 이르러 국가 중흥기틀을 마련하고, 무령왕 대에는 확실한 정치적 안정과 함께 국력 증진을 이루었습니다.

무령왕을 이어 즉위한 성황이 16년에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면서 백제는 다시 한 번 중흥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비지역 천도이후 국가적 중흥을 이룬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 신라와 연합하여 한때 한강일대를 탈환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신라의 역공으로 다시 한강유역을 상실하였고 이에 보복전쟁을 하는 등 혼란을 거듭하다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백제는 멸망을 하였습니다.

백제가 멸망된 후 금강유역에서는 백제의 부흥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으나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신라는 옛 백제지역과 그 지역의 주민을 포함하여 9주 5소경 체제를 마련하였고, 백제지역에는 웅천주, 완산주, 무진주 등의 3개 주가 설치되었습니다.


3) 고려시대

왕건의 고려건국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은 금강유역의 청주, 공주지역의 호족 세력이었습니다. 청주에서는 두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고, 공주에서는 이흔암이 궁예에 대항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려 초기에는 이 지역 출신이 중앙의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고, 중엽에는 가끔 재상의 지위에 오른 자도 있었으나 매우 드물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는데 이를 막기 위하여 금강유역의 서쪽에 수많은 읍성을 개축하였습니다.


4) 조선시대

조선이 개국하면서 금강유역의 계룡산지역이 새로운 수도 후보지로 떠오르게 됩니다. 금강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북도와 충청도 일대를 관통하는 큰 강으로 공주까지 선박의 통행이 비교적 자유로운 강이었기 때문에, 금강유역의 계룡산 신도내가 강력한 후보지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금강수로의 편리함은 이후 조운제도나 조선후기 상품유통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조창은 모두 9개로서 금강유역의 각 군현의 조세는 충청도 내륙 깊숙한 지역인 황간, 영동 등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아산의 공세곶창과 용안의 덕성창에 수납되었습니다. 금강 북안의 각 군현의 세곡과 충청도 북부지방의 세곡은 아산의 공세곶창에 모아져 조운으로 한양에 옮겨졌는데, 이는 금강 수로를 이용할 경우 한양으로 통하는 해로의 중간에 위치한 안흥량의 험난함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금강 하류에 위치한 용안의 덕성창은 이러한 전라도 북부지역의 세곡이 집결되는 곳으로 본래 위치는 용안의 금두포였으나 세종 때 감세의 피포로 옮겨 성당창으로 개칭하였다가, 성종 때 다시 용안창으로 옮기고 이름을 덕성창이라 하였습니다. 덕성창은 전국의 조창 가운데 가장 많은 선축을 보유한 최대 규모의 조창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의 새곡이 금강하류에 집결되어 운송됨으로써 금강은 충청, 전라도 일대의 산물이 집결하는 유통로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여 조선후기 가장 선진적인 상업발달지역의 하나가 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금강유역은 17세기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양법의 발달, 수전 이모작의 보급, 제언 · 보 등 수리시설의 발달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진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급격히 축소·황폐화된 농경지를 확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습니다. 금강유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많은 지류는 보의 신축과 신전개발의 주요대상지역으로 넓은 면적을 관개할 수 있는 대보가 발달하였습니다.

금강유역은 국가전매의 소금과 주변유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미곡이 거래되는 중심지역이 되어 장시의 발달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대표적인 전주의 사탄, 강경의 강경포 등이 있습니다.


5) 근대시대

일제에 의해 조선이 합병되면서 공주 등 전통적 기반을 지녔던 지역들이 점차 축소되고, 금강 중하류의 중심지는 새롭게 성장하는 대전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던 기존의 문화적 기반들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습니다. 1932년 대전으로의 도청 이전은 그 같은 작업의 하나였습니다.

지형 상으로 공주가 천연의 요새지로 육운과 금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하여 호서의 중심으로 오랫동안 지위를 확보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철도교통이 교통로의 간선을 이루게 되자 종래 육운의 교통로는 새로 개통된 철도의 영향 하에 흡수되어 버리고 동시에 운하 역시 토사퇴적과 철도교통의 발달로 그 중요성이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1905년 경부선 개통과 1914년 호남선 개설은 금강 중하류의 중심지를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동시켜 이 지역 전통적 기반을 해체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6) 현대시대

광복 후 금강유역은 별다른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1970년대 ‘금강유역조사’를 계기로 유역의 수자원개발을 위한 기본구상이 완성되었습니다. 유역조사의 결과로 대청댐이 완공되어 대전·청주지역의 용수공급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서해안 해안지역의 논농사를 위한 삽교호·금강하구언 등의 농업용수 공급시설이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금강 상류에 용담댐을 건설하여 전주 인근지역의 생활용수 공급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및 호남고속도로는 금강유역과 서울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으며 이로 인한 물류혁신으로 수많은 공장과 주택 등이 대규모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교통의 발달은 대전 및 전주권을 중심으로 대규모 공단을 증설하여 지역의 소득증대에도 이바지하였습니다.



[금강 모식도]


3. 문화

금강유역은 풍요로운 문화의 젖줄이 되었고, 또한 서쪽으로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대륙과 마주하여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는데도 매우 유리하였습니다. 서해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는 한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의 문화가 해로로 연결되는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금강 유역은 농업 선진지역이었고 농업발달에 따른 생산력과 수로교통을 바탕으로 상품유통경제가 크게 발달하여 조선후기 자본주의의 발생에 있어 가장 앞선 지역의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문환경과 자연조건은 이 유역을 한국의 독특한 지역문화를 꽃피웠던 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심지로 자리 잡게 하였습니다.

근대교통이 발달하기 이전 지역 간 물화의 교역은 육로보다는 수로에 의한 것이 더 컸습니다. 금강 유역에는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발달하여 일찍이 많은 인구가 거주하였으며 물동량도 많았습니다. 이에 따라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금강의 내륙 수운이 매우 발달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대곡창의 세곡이 금강하류에 집결되어 운송됨으로 인하여 금강은 충청, 전라도 일대의 산물이 집결하는 유통로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금강유역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여 조선후기 가장 선진적인 상업발달지역의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18세기 이후 미곡, 면화, 면포 등이 주요한 상품으로 등장하면서 장시가 발달하자 금강유역의 공주, 청주, 강경 포구는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상업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중 강경포구는 금강유역의 대표 포구 및 원격지 교역의 창구로서 각지의 상선이 모여 교역을 행하는 대도회지로 발전하게 됩니다. 금강 수운의 이러한 기능은 개항기와 일제시대에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1899년 군산항에 개항을 계기로 대형선박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금강 수운은 상업적 이용이 크게 촉진되기도 했습니다.

 
[출처] 금강유역조사보고서(2006, 국토교통부- 한국수자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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