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한국의 중부, 강원도·충청북도·경기도·서울특별시를 거쳐 서해로 유입하는 강

한강(漢江)은 한반도 중부 지방을 동에서 서로 관통해 황해로 유입되는 한국의 주요 하천입니다. 태백산맥의 금대봉 정상부 북쪽 비탈에서 발원하여 강화해협 부근의 어귀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본류로 합니다. 《한국하천일람》 2013년 판에 따르면 본류 총연장은 약 494km으로, 압록강·두만강·낙동강에 이어 한반도에서 네 번째 긴 강입니다.현재의 한강이라는 이름은 백제가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중국식으로 한수(漢水)라 한 것이 한강으로 변한 것이라는 주장이 유력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되었는데,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가람'은 크고 넓은 강을 의미하는 고어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강의 이름은 그 지역에 따라 다른 경우가 많은데, 송파부근의 한강을 송파강이라 하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강을 부르는 이름은 모든 지류를 통틀어 말하거나 양수리와 한강 하구 사이의 한강 본류를 일컫는 경우가 많습니다.한강 본류는 경기·관동·해서·호서 네 개 지방에 걸쳐 북한강·임진강을 위시한 수백 개의 지류를 거느리고 있으며, 이 지류들을 기반으로 한 수계망인 한강 수계는 한국을 지나는 모든 하천 수계망 중 두 번째로 넓은 빗물받이(35,770 km², 한반도 전체 넓이의 약 1/6)을 하고 있습니다.


1. 유래

한강의 이름은 본래 우리말의 큰 물줄기를 의미하는 ‘한가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은 ‘크다’, ‘넓다’, ‘가득하다’, ‘바르다’의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옛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한강은 크고 넓으며 가득한 물이 흘러가는 강이라는 뜻입니다.

한강은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중국의 한·위나라에서는 ‘대수’라 하였는데, 이는 한강과 임진강의 모습이 한반도의 허리에 띠를 두른 것과 같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고구려 광개토왕비에는 ‘아리수’로 표기되어 있으며, 백제에서는 ‘욱리하’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신라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라 불렀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산하’ 또는 ‘북독’이라 표기하였고, 고려 때에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으로도 불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부근의 한강을 가리켜 ‘경강’이라 불렀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강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백제가 동진과 교류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 ‘한수’라 부른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차 한수 또는 한강으로 불리게 된 것과 한강이 본래 우리말의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크고 넓다는 뜻의 우리말 ‘한’과 강의 고어인 ‘가람’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2. 역사


1) 선사시대
사람들이 한강에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구석기 시대부터입니다. 한강유역의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수량, 고루 발달된 샛강, 강안 좌우 언덕의 우거진 숲, 유역 주변에 서식하는 동물 등은 한강 주변에서의 주거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한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지류가 잘 발달되었기 때문에, 강 유역과 하구 및 가까운 섬들은 신석기인들의 거주지로서 아주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한강은 신석기인들의 생활무대가 될 수 있었으며, 그 흔적으로 곳곳에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이 있습니다.

1925년 서울의 반 이상이 잠기는 대홍수로 인해 드러난 서울 암사동 유적은 신석기시대에 한강유역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서울 암사동 유적지에서 신석기인 거주했던 20여 채의 움집터와 그 부속 시설물들이 발굴 확인되었는데 생활상은 5~10인을 한 단위로 하고 15~20여 채의 집들이 부락을 이루어 공동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강주변에서 신석기인들의 흔적은 강원도 춘천 내평리를 비롯한 경기도 파주·고양·양주·광주·부천·시흥, 서울 암사동·응봉동, 충북 제천에 이르기까지 한강 줄기를 따라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빗살무늬토기, 망치돌, 괭이, 돌낫, 보습, 그물추 등이 다량 출토되었으며, 신석기인들은 농경과 수렵, 어로를 통해 식량을 해결하였습니다. 또한 춘천 교동에서 출토된 어구와 그물추, 한강 하류를 따라 남아있는 패총들은 한강의 어패류가 신석기인들의 식량원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 삼국시대
한강유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장소입니다. 고대왕국체제가 정비되는 시기에는 영토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강처럼 큰 강은 세력을 구축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반도에 삼국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는 중국 및 일본과 교류에 유리한 위치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삼국 가운데 제일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했던 나라는 백제였습니다. 일찍이 교역활동을 통해 주변 정세에 밝았던 백제는 동진과 교류를 한 370년을 전후로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왕위계승원칙을 부자 상속의 형태로 변화시키며 왕권을 날로 강화시켰습니다. 이 일대에 자리를 잡은 백제는 남으로 마한의 영산강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는 동시에 서해와 남해로 통하는 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중국 및 일본과 교류하면서 활동무대를 한반도 밖으로 넓혀 나가게 됩니다. 이처럼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에 제동을 건 것이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미천왕 이후 남진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려 하였고, 광개토왕 때에 이르러 백제의 관미성을 빼앗고 4세기 말 한강 이북의 여러 성을 함락시켜 ‘아리수’ 유역을 점령하였습니다. 5세기말에 이르러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하남 위례성 일대를 남평양이라 하여 고구려의 남쪽 중심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고구려는 이후 80여 년간 한강유역을 다스리며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고구려가 이처럼 남진하게 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가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여 551년 공동으로 북벌에 나서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아 백제가 하류지역을, 신라가 상류지역을 각각 차지하였는데, 불과 2년 뒤 다시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 서울 지역은 초기에는 ‘양주’,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는 ‘한양’으로 불렸습니다. 983년 전국에 12목이 설치되면서 한강유역 이북은 양주목, 이남은 광주목으로 나눠졌습니다. 특히 문종 21년(1067) 양주에 서경 · 동경과 더불어 3경의 하나인 남경이 설치되어 서울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남경의 정치·경제·군사적 중요성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으며, 민심수습을 위한 지리도참사상에 일치한 남경의 역사·지리적 중요성 또한 부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참사상에 따른 길조가 나타나지 않자 남경은 약 10년 만에 폐지되고, 숙종 때 다시 재건되어 북악 아래 오늘날 청와대가 자리하고 있는 터에 연흥전 등 궁궐이 신축되었습니다.

1308년 충선왕이 관계개혁에 따라 남경을 한양부로 개편하면서 단순한 지방 도시로 변모하였습니다. 따라서 한양부는 고양 · 양주 · 포천 등 현재의 한강 이북 서울 지방과 그 주변 일대만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왕의 순행과 어의 안치 등 정치적 중요성은 사라지고, 개경과 가까운 이유로 국왕의 놀이와 사냥터가 되었습니다. 후에 공민왕의 자주적 개혁정치에 따른 배원정책 실시와 관제의 환원으로서 남경이 부활되기도 하였으며, 왜구의 창궐에 따른 천도 움직임으로 한강유역 서울지방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즉 우왕 9년과 공양왕 2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6개월씩의 한양 천도에 이어 조선왕조도 한양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지리·군사·사회·경제적으로 한강을 터전으로 한 한양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 한강유역의 역사·지리적 의미는 한강을 허리띠로 하고 삼각산을 진산으로 삼아 조선왕조의 도읍지를 형성하였다는 것입니다. 한강은 한반도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수륙교통이 편리한 점 등 생업의 터전이자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강의 수운과 육로를 통해 모여든 전국의 산물은 다시 같은 경로를 통해 전국의 상권으로 흩어져 나감으로서 조선시대의 한강은 상업과 공업의 중심으로 한양의 구조가 재편성되는 기반을 제공하게 됩니다. 전국적인 조세체계가 강화되면서 조선 팔도의 사람과 산물이 한양으로 집중되고, 공물이 대량으로 운반되어 1394년 한양 천도 이후, 한강 유역은 정치와 경제생활, 그리고 사회와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습니다.


5) 근대시대
조선 말기에 한강은 서양열강과 부딪치는 첫 접촉점이었습니다. 개항을 우리 근대사의 출발로 본다면 한강은 ‘근대의 문’이었던 셈입니다. 1866년 국내에 잠입해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 가운데 주교 2명, 신부 2명이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되는 일을 계기로 프랑스가 두 차례에 걸쳐 서강과 강화도에 침입한 병인양요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밀려들어온 서양열강을 비롯한 새로운 문물은 마침내 1876년 개항을 기회로 ‘근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한강은 그 길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1890년경부터 용산 일대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마포 당인리 일대는 중국 세력이 진출하면서 처음에는 개시장을 통한 경제침투가 시작되었고, 또한 제국주의 침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개시장이 설치되고, 사람의 통행을 위해 1888년 한강에 증기선이 취항하였으며, 1900년대에는 전차와 철도가 놓이고, 한강에 철교가 설치되었습니다. 철교가 완성되면서 한강은 한반도의 남북을 이어주는 역할로 새롭게 부각되었으며, 이 시기가 한강의 역할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 시점입니다.


6) 현대시대
광복 후 1949년과 1963년의 서울 시역 확대로 인하여 서울특별시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 · 강북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말 유역조사를 통하여 서울의 장기발전에 중요한 계획을 미친 ‘한강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개발내용은 한강전역에 걸쳐 보다 견고한 제방을 구축하여 이를 자동차 전용도로로 하고 제방을 종전의 위치보다 안으로 들여쌓음으로써 생겨나는 넓은 하천 부지에 강변시가지를 건설하여 고층아파트를 짓는 한편 여의도 윤중제를 만들어 신도시를 조성하며, 마포와 여의도를 연결하는 제4한강교(서울대교)를 가설하여 한강의 고속화를 꾀함으로써 한강을 도시의 중심 생활권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습니다. 여의도 윤중제 공사를 그 시작으로 한 이 여의도의 개발은 서울의 남쪽 경계였던 한강을 서울의 중심부로 바꾸어 놓는 대역사였습니다. 이후 강남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서울의 면적도 두 배 이상 늘어나게 됩니다.

또한 1970년대부터 한강개발이 추진되어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균형있게 발전하게 됩니다. 1988년에는 한강변 잠실지역에서 인류의 최대 축제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2002년에는 월드컵 축구경기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세계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었습니다. 한민족의 웅비하는 모습을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한강의 역사·지리적인 가치는 한민족의 역사 중심을 같이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강은 민족문화의 통합성을 바탕으로 한민족 문화의 세계로의 지향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한강 모식도]


3. 문화

한강은 정치·군사·사회·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생활과 풍속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한강을 이용한 교역은 각 지방의 문물이나 풍속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남한강의 지류를 통해 충청북도 지역의 문화가 유입되었으며, 북한강을 통하여 강원도의 문화가 경기도로 유입되었습니다. 또한 반대로 경기도의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기도 하였습니다.

북한강유역은 일반적으로 평야보다는 산지가 많았기 때문에 산을 개간하여 옥수수나 감자와 같은 농작물을 생산하였습니다. 북한강을 끼고 있는 이들 지역은 산세가 험하며, 강의 흐름도 빠르기 때문에 수송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현재는 소양강댐이나 청평댐 등이 건설되어 유명한 관광지로도 이용이 되고 있습니다. 강을 이용하여 생활하던 문화는 현재 전승되는 놀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강원도 인제의 숯굽기놀이, 뗏목꾼놀이, 화천의 소금배 오는 날 등의 민속놀이는 산간지방의 자원을 이용한 생활상과 강을 이용한 문물 교류가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한강 유역이 북한강과 다른 점은 산지보다 평야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농사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먹을 것이 풍족하여 인심도 좋았습니다. 논농사를 위해서 단합된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줄다리기가 영월, 제천, 충주, 여주 등에서 많이 발달하였고, 경기도 여주와 이천에서는 거북놀이를 하면서 수확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한강은 농경생활이 정착되면서부터 제의의 대상으로 섬겨져 왔습니다. 수재, 한재 등 재앙이 닥칠 때 제의가 베풀어졌으며, 개인적으로는 집안의 우환이나, 사고나 물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 행해졌습니다. 특히 국가에서 행하는 경우에는 기우제 , 겨울에 눈이 오지 않을 경우에는 기설제를, 겨울인데도 따뜻할 경우에는 추위가 와 달라는 기한제를, 또 장마가 계속되면 날씨를 맑게 해달라는 기청제를 행하였습니다.

 
[출처] 한강유역조사보고서(2004, 국토교통부- 한국수자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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