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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섬진강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 자락의 옥녀봉 아래 데미샘에서 발원하는 강입니다. 총길이는 225.3㎞, 유역면적은 4,896㎢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를 흐르며 보성강, 요천 등의 여러 지류와 합쳐져 광양만으로 흘러들어 갑니다.강 유역에는 임실·남원·곡성 등의 분지가 있지만 평지는 드문 편이며, 강이 좁고 물속에 바위가 많아 가항거리는 39㎞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수력자원은 비교적 풍부한 편이며 섬진강 본류의 섬진강 댐과 수력 발전소와 지류인 보성강의 유역변경식 발전소가 있습니다.1. 유래원래 섬진강은 ‘가람 사수강’·‘사천’·‘두치강’ 등으로 불렀는데, 고려 우왕 11년에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 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이 있어, 이때부터 강 이름에 두꺼비섬(蟾), 나루 진(津) 자를 붙여 섬진강이 되었습니다. 또한 하천지리학자인 이형석 씨의 조사에 의하면 섬진강은 단군 때는 ‘모래가람’, ‘모래내’라 불리다가 그후 ‘다사강(多沙江)’, ‘대사강(帶沙江)’이라 불리웠으며 이후 ‘두치(豆恥, 豆置)’강이라 불렸다고 합니다.2. 역사1) 선사시대섬진강 주변의 구석기 문화는 섬진강의 큰 지류인 보성강 주변의 유적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순천과 월평의 구석기 유적은 10만년에서 1만년에 해당하는 중기, 후기 구석기 문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순과 순천의 구석기 유적으로 볼 때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섬진강 유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섬진강 유역에서는 아직 신석기 시대 관련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섬진강 주변의 자연 환경으로 볼 때 신석기시대에는 보다 넓은 지역에서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주변지역과 문화교류를 하면서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섬진강 유역의 청동기 시대 유물을 살펴보면, 한반도의 서해안 지역과 동해안 지역의 문화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 일찍부터 문화의 복합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지석묘가 전남 지역에만 2만여 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하였습니다.또한 구례군 봉서리와 순천시 우산리에서도 고인돌을 찾아볼 수 있으며, 순천에서는 집터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전남 지역의 철기 문화는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며 기원 후 3세기 후반까지 지속됩니다. 중부권의 마한은 3세기 말까지 활동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에는 백제의 세력에 밀려 남부지방으로 밀려 내려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섬진강 주변은 이 시기에 마한과 변한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관련 유적으로는 순천연향동의 유적이 있습니다.또한 지금의 남원은 가야 시대에 기문국이었으며, 현재 남원의 가야 관련 유적은 상백리, 월산리, 백천리 고분군이 있습니다. 2) 삼국시대삼국시대 초기에는 섬진강 유역은 마한과 변한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데, 섬진강 유역이 언제 백제 영역에 편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백제가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활발한 정복사업으로 전남 남해안 지역에 이르고, 무령왕 대에는 섬진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으며, 무왕 대에 와서는 섬진강 유역 전체가 백제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그 후 신라의 삼국통일로 섬진강 유역은 신라의 영역이 되어 9주 5소경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완산주에서 무진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신라 하대에 이르러 신라의 전제 왕권이 무너지고 각 지방에 호족세력이 성장하였는데, 이때 섬진강 유역은 견훤이 무진주에서 시작하여 전주로 옮겨 후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보아서 무진주 관내에 있던 전라도도 후백제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습니다.섬진강 유역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으로 양국 간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지역이며, 후삼국시대에는 견훤의 후백제가 점차 영토를 확장하며 신라와 고려를 상대로 하여 접전을 벌이던 지역이었습니다.3) 고려시대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새로운 시대를 연후 섬진강은 이질적인 체제가 집단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라 융화와 교류의 교차로였어야 하지만, 섬진강 유역에서 그러한 개방성이 두드러진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앙 정부와의 지리적인 거리만큼이나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지역적인 독자성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섬진강 유역에 자리 잡은 고을들을 살펴보면 지사부에 해당하는 남원을 제외한 거의 전부가 속현이거나 속군이었습니다. 이것은 지역적인 영세성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면 그만큼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 지방 토착세력의 뿌리 깊은 존재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점이기도 합니다.고려 말 섬진강 유역은 왜구 침입의 피해를 많이 받은 지역입니다. 왜구의 약탈행위는 전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지만 그 중에서도 남해안 지역이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하였으며, 곡창지대이자 조운의 통로에 위치해 있던 서해연안 지역이 또한 주요한 약탈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조운의 통행로가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동해안보다는 서해안이 왜구의 약탈을 더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같은 곡창지 대권에 놓여 있었던 섬진강 유역은 남해안이나 서해안을 통하여 침입해 오는 왜구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당하였습니다.4) 조선시대섬진강 유역은 삼국시대부터 군사?지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충지대로, 중·하류 유역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으로서 양국 간의 영토싸움이 치열했던 곳이며, 고려 때는 해로를 통해 왜구의 침략이 매우 잦았던 지역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중에도 섬진강 유역은 국가의 중흥기지인 호남지방의 보전여부가 곧 섬진강 연안의 제읍(諸邑)의 보전여하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전략상 절대적인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시 전라도에서 있었던 최초의 전투는 섬진강 상류지역에서 전개되었는데, 임진년 6월 하순에 임실 운암계곡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그 것입니다. 이 전투는 양대박 휘하의 남원 의병이 거둔 승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극복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전이었습니다.정유재란은 일본군의 전라도 침략전쟁으로 규정해도 좋을 만큼 적으로부터 호남지방 전역이 철저히 유린되었습니다. 임진란 제1차 침략전쟁의 패인이 호남 의병과 수군 때문이었다고 판단한 일본 측의 재침 목표가 먼저 전라도를 공략하는 것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호남지방의 전쟁피해는 매우 컸습니다. 특히 섬진강 하구에 상륙한 적의 대군이 연안을 따라 상류지역으로 북상하면서 시작된 온갖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조선후기는 농민항쟁의 시대였습니다. 섬진강 유역에서도 다른 삼남지방과 마찬가지로 1862년부터 농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섬진강 유역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으로 순천과 광양의 농민항쟁이 있고, 그밖에 진안, 장수, 임실, 남원, 운봉, 구례, 옥과, 곡성 등 섬진강 유역의 거의 모든 군현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섬진강 유역의 농민들은 수령과 이서배의 부정과 탐욕에 과감히 맞서 투쟁하였습니다.5) 근 · 현대시대조선은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근대사회로 이행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양반 지배체제의 모순이 극대화됨으로써 민란이 빈발하였으며, 밖으로는 국제주의 열강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1984년 동학농민혁명의 물결은 섬진강 유역에도 거세게 일었는데, 임실에서 하동의 화개에 이르기까지 농민군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원과 순천·광양 지역에서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였습니다. 농민군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인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하고서 전라좌도를 통치하였으며 김개남의 핵심인물인 김인배는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두고서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섬진강 유역에서도 반일 의병전쟁이 전개되었습니다. 1870년 후반 이후 약 2년 동안 의병투쟁은 가장 격렬하여 전쟁이나 다름없었으며, 의병투쟁 후기에는 전라도 의병활동이 가장 왕성하였는데 섬진강 유역도 그 예외는 아니었습니다.기미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 각 지역을 원의 불길처럼 번졌습니다. 섬진강 유역의 경우 독립선언서는 천도교 조직을 통해 서울에서 전주로, 다시 전주에서 진안, 장수, 임실, 남원, 구례, 순천, 광양, 여수 등지로 전달되었습니다. 만세시위는 섬진강 상류 지역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나 하류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더욱 거센 물결을 만들면서 퍼져 나갔습니다. 일제의 패망으로 식민지 조선은 해방되었지만, 38선을 경계로 한 분단이 민족을 갈라놓게 됩니다. 섬진강 유역은 분단으로 인한 좌우 갈등이 격심한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의 분단으로 인한 상처는 1948년 10월에 일어나 이른바 여순사건에서 극에 달하였습니다. 여순사건은 여수에 위치한 14연대 장병들이 제주도 4?3항쟁 진압을 거부하며 일으킨 군인폭동이었습니다. 여기에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인근 지역주민들이 합세함으로써 내란의 소용돌이를 일으켰습니다. 이후 섬진강 유역은 빨치산 투쟁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는데, 빨치산의 지리산 유격지구는 남한지구 유격대의 총 본산이라 할 수 있으며 남로당의 거물인 이현상이 관할하면서 북으로 무주 덕유산, 남으로 광양 백운산을 연결하며 활동하였습니다. [섬진강 모식도]3. 문화섬진강 유역은 험준한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세계와의 왕래가 크지 않아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였습니다. 또한 섬진강 유역은 역사시대 이래로 동서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세력의 영토 쟁탈의 대상이 됨으로써 수많은 전란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동서의 대립보다는 문화적 연결교량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역대 중앙권력의 주변지역이었기 때문에 지배층의 문화가 미친 영향이 적기 때문에 낙동강 유역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양반문화의 흔적이 적고 도시의 발달이 더딘 반면 토착세력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큽니다. 따라서 섬진강 유역의 경우에는 피지배계층 문화의 잔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섬진강 유역은 근대 산업화과정에서도 소외되어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여전히 농업에 대한 의존이 크며 자본주의의 상업화에 예속되어 있는 실정입니다.[출처] 섬진강-영산강유역조사보고서(2006, 국토교통부- 한국수자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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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영산강은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의 젖줄로서 담양 지나 광주·나주·함평·영암·목포를 지나 황해로 흐르는 강입니다. 황룡강과 광주천이 광주에서 합류하고 지석천이 나주에서 함평천·고막원천 등이 함평에서 합류합니다. 길이는 115.5Km이며, 유역면적은 3,371㎢입니다.영산강의 발원지는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용연리에 있는 가마골의 용소입니다. 강의 길이로만 보면 황룡강의 상류인 병풍산 용흥사 계곡에서 발원하는 북하천이 더 깁니다. 또한 담양호를 지나 담양댐부터 담양읍 경계까지 지방하천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담양읍부터 영산강하굿둑까지 국가하천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1. 유래영산강의 원이름은 금강진(錦江津: 일명 금천)이며 고려시대부터 배류하는 3대강이라 불리어 왔습니다. 지금의 나주시인 영산포는 수륙교통의 요지로 에로부터 이름이 널리 알려져 ‘강물이 영산포구를 지나 흘러 내려간다’는 뜻으로 나주에서 영산포까지를 영산강이라 부르게 된 것이 강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영산강의 중류에 위치한 나주의 이름은 통일신라 때 금성이라 불렀는데 이러한 연유로 나주시를 통과하는 강 이름을 금천 또는 금강이라 부르고 강을 건너는 나루터를 금강진이라 하였습니다. 조선 초기 때 영산포에 조창을 두고 창성을 쌓아 나주를 비롯한 16군현의 전세를 모아 이곳에서 한양으로 운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번창한 영산포의 명성으로 인하여 금천, 금강, 금진강에서 영산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영산강 명칭의 경우 본류와 지류에 따라 수십 개의 명칭이 기록(대동여지도 등)에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나주 동쪽 상류는 광탄강, 영산포 부근은 남포강 · 영산강, 함평 쪽은 사호강, 더 남쪽으로 무안 쪽으로 내려와서 곡류하는 지역은 곡강이라고 불렀습니다. 호남의 내륙을 관통하는 영산강은 예로부터 이 지역 수운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조창 가운데 하나인 영산창이 영산포에 설치되었습니다. 영산창은 조선 전기 9개의 지방창고 가운데 하나였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 일대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고, 그래서 그 주변의 강 이름을 ‘영산강’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2. 역사1) 선사시대영산강 유역의 구석기 문화는 광주 치평동 유적, 광주 산월 유적, 광주 매월동 유적 등 영산강 중류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바 있으며, 신석기문화는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신석기시대 전기에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영산강 유역에서 출토된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은 대체적으로 석실 주변 등에서 생활용품들이 출토된 반면에 보성강, 남해안 지역에서는 석실 내의 부장용과 석실 주변의 실용품들이 출토되고 있어 양 지역 간 문화적인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영산강유역에서는 화순 대곡리, 함평 초포리 석관묘에서 세형동검 등 청동기기 일괄로 출토되고 또 장천리 지석묘에서 세형동검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세형동검문화가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2) 삼국시대영산강유역의 원삼국시대인들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면서 수렵, 어로생활을 부업으로 대단히 높은 경제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백제가 영산강유역에 대한 진출을 처음 시도했던 것은 4세기 후반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4세기 후반 백제가 왜와 함께 가야 지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가하여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교역권을 확보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남해안을 따라 해남지역을 공격, 점령하여 영산강유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침투를 위한 거점을 확보하였습니다. 이것이 백제의 영산강 유역 진출의 첫 시도였습니다. 이후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면서 영산강 유역을 차지하고 6세기 중 · 후반에는 5방제중 지금의 영산강 유역이라 할 수 있는 남방으로 편제되어 신라에 멸망 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6세기 말 영산강유역은 남방을 폐지하고 나주지역에 발라주를 두어 편제하더니 신문왕 6년에 발라주를 발라군으로 강등시키고 광주지역의 무진군을 무진주로 숭격하여 영산강유역 편제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통일신라는 대외교류의 측면에서 서남해안 지역을 중시하였으며, 신라하대 영산강유역은 해상활동이 활발하였습니다. 해상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새로운 세력이 대두하였으며 당에 유학하는 선승들이 이곳을 출발점이자 기착점으로 삼으면서는 새로운 선종승려와 유대를 맺는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이 지역을 통해 대중국의 외교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산강유역에는 많은 농경지가 분포되어 있어 농업생산에서도 비중이 큰 지역이었습니다.3) 고려시대고려시대에는 나주목을 중심으로 2개의 군현으로 편제되어 무인시대까지 운영되다가 무인시대에는 대몽항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로 외세에 대항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 말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되고 난 뒤, 영산강유역은 비교적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의 중앙정계 진출은 영남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는데, 그 이유는 왜구의 잦은 침입 때문이었습니다. 왜구의 침입은 충정왕 때부터 고려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읍치를 내륙으로 이동하여 역사 문화가 크게 단절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4) 조선시대조선시대에는 영산강유역이 나주를 중심으로 주변 속현을 다스리는 형태를 취하였는데 이는 나주가 정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평가됩니다. 조운제도 역시 법성창과 함께 나주 영산창이 주변지역의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영산창은 영산강을 경계로 종남부의 군현들이 배속되어 있고 법성창에는 영산강의 서북부지역 군현들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창은 후기에 들어와 약간의 변동을 겪는데 나주의 영산창이 수로가 험하여 법성창에서 영산창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조선시대 중기에는 있었던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시는 영산강유역의 많은 군관민이 합심하여 왜적을 물리쳐 지역을 방어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는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의 항쟁이 자주 일어났으며, 이 중 동학혁명의 발생지가 영산강 유역입니다.5) 근 · 현대시대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의병활동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3.1운동 및 광주학생운동사건 등 주요한 항일투쟁 및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는 저항이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일찍 일어난 지역이기도 합니다. 또한 노동운동, 사회운동 등의 대주운동이 활발하여 지역민 의식을 고취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좌 · 우익의 대립이 가장 극심한 지역이었으며, 근대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지역이기도 합니다.[영산강 모식도]3. 문화영산강은 전남의 나일강이라 부르기도 하며 북부의 담양에서 시작하여 서남지방을 종류하면서 그 주변에 일찍부터 찬란한 문화를 배양했고 이 지역을 우리나라 제일의 쌀 생산지로 만들었습니다.한민족이 오랜 이동 끝에 안식처로 자리잡은 이 지역은 기름진 옥토와 온화한 기후, 수려한 산천을 두루 갖춘 천혜의 보금자리였으며 일찍부터 찬란함 문화를 꽃피워 왔습니다. 특히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한국의 근 · 현대사에서 영산강유역은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영산강유역은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보고로 많은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고 있으며 많은 전승문화를 간직하여 우리문화의 참모습을 살피는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출처] 섬진강-영산강유역조사보고서(2006, 국토교통부-한국수자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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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낙동강은 한반도에서 압록강 다음으로 긴 강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강입니다. 강원도 태백시의 함백산 동쪽에 있는 작은 저수지인 황지연못에서 발원하는 이 강은 태백시에서는 황지천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낙동강은 대구분지를 지나 부산 서쪽에서 분류되어 남해로 흘러 들어가며, 길이는 510㎞이고 유역 면적은 23,384㎢입니다.옛날에는 내륙지방의 교통 동맥으로 되어 하안에는 하단·구포·삼랑진·수산·남지·현풍·왜관·낙동·풍산·안동 등의 선착장이 발달되었으며 가항거리는 343㎞나 되었습니다.낙동강의 발원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강원도 태백시에서는 1486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편을 근거로 '황지연못'을 낙동강의 발원지로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 현지답사를 통하여 '너덜샘‘을 발원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1. 유래낙동강은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황산강’, ‘황산진’, ‘가야진’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역사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낙수’, ‘낙동강’이라 하였습니다. 황산이란 이름은 지금의 양산시 물금읍에 있던 황산나루에서 유래한 것으로 삼국시대에 신라의 수도 경주와 가락의 중심지 김해 사이에 교류가 성했던 곳입니다. 낙동강은 가락의 동쪽을 흐르는 강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 가락은 삼국시대에 가락국의 땅이었던 지금의 경상도 상주 땅을 가리킨다. 상주의 옛 이름은 낙양이고, 낙양의 동쪽을 흐른다하여 낙동강이라 불리었습니다. 조선시대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 ‘지리전고’편에 “낙동은 상주의 동쪽을 말함입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2. 역사1) 선사시대낙동강유역에서 사람이 활동한 가장 오랜 흔적은 중석기 또는 세석기라 불리는 문화단계입니다. 이는 낙동강유역 내에서 정착이나 취락 형성이 시작되는 신석기시대보다 앞서는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 유적, 칠곡군 석적면 중리 유적,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유적 및 거창군 남상면 임불리 유적 등이 있습니다. 낙동강 유역의 선사문화는 신석기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체로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는 시베리아를 거쳐 두만강으로부터 들어왔으며,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로 대표되는 빗살무늬토기는 압록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서남도서, 두만강 등의 6개 군으로 나누어집니다. 낙동강유역에서 발견된 주요 신석기문화 유적은 부산 동삼동 유적, 부산 금곡동 율리 유적, 부산 다대동 유적, 부산 영선동 유적, 부산 암남동 유적, 울주군 서생 유적, 김해 수가리 유적, 김해 농소리 유적, 산청 강누리 유적, 청도 오진리 암음 유적, 김천 송죽리 유적으로 대표됩니다. 낙동강유역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 이후 신석기시대 문화가 소멸하면서 전개되는데, 이 시기에 생활터전은 해안이나 큰 하천의 사구지대에서 하천상류의 내륙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낙동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주요 유적은 대구 월성동 주거지 및 유물 산포지, 대구 연암산 유적, 대구 침산동 유적, 대구 괴전동 유적, 대구 이천동 지석묘군, 고령 양전동 유적, 거창 대야리 유적, 합천 저포리 유적, 창녕 유리 지석묘, 진주 대평리 유적, 진주 신당 · 덕오리 유적, 김해 내동 지석묘, 창원 덕천리 유적 등이 있습니다. 낙동강유역에 자리 잡은 무문토기인들의 문화를 살펴보면 중국 화북지방이나 남방의 먼 해외에서 직접 이주해 온 것으로는 보이지 않고, 주로 한반도 북부 요동지방이나 중국의 동북지방 문화의 영향권에 있었던 종족이 남으로 이주하여 낙동강유역 일대 여러 곳에 정착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철기시대에는 철기문화와 병행하여 삼한이 형성되는데 대체로 마한이 경기, 충청, 전라남도 지방을, 진한이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방, 변한이 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방을 각각 차지하였습니다. 낙동강 유역의 변한과 진한 지역은 1세기 무렵부터 상당한 수준의 철기시대를 맞게 되는데, 울산과 동래 지방의 제철유지 등이 철기시대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김해 등지의 김해식 토기와 사천, 진주, 고성, 밀양, 동래 등지의 패총, 지석묘, 옹관묘 등에서 출토되는 석검, 철검 기타 철제 유물 등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김해 패총 등에서는 탄화된 쌀알이 나와 이미 저습한 충적평야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특히 낙동강 하류지역은 남쪽 바다를 끼고 있어 해륙교통의 요충지였고 또한 비옥한 충적평야와 이어져 있어 농경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이런 삼한사회에 있어서 낙랑, 대방군으로부터 대륙의 금속유물도 낙동강유역을 통해서 수입되어 진한과 변한의 부락국가를 개방시켰습니다.2) 삼국시대낙동강의 동쪽에 자리 잡은 신라는 진한의 12개 소국 중의 하나인 사로국이 주위의 작은 집단들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혀 나가면서 실질적인 왕국으로 발달하게 됩니다. 지증왕과 법흥왕 연간에는 불교를 국교로 수용하는 등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진흥왕 대에 신라는 국력이 강해져서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가야를 복속시키며, 북으로 원산만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후 계속되는 백제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중국의 당나라와 손잡고 양국을 공격, 삼국을 통일하여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확보하였습니다. 가야는 낙동강 중?하류의 기름진 땅에 자리 잡은 변한 12국이 모체가 되어 6~7개의 독립적인 가야 연맹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대표적인 소국은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령의 대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및 고성의 소가야 등이 있으며 전기에는 금관가야가 맹주국 이었으나 후기에는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국이 됩니다. 신라와 가야는 선사시대 이래로 같은 문화영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양국의 문화는 거의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는 삼국처럼 왕권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대가야의 멸망을 끝으로 신라에 병합되었습니다. 삼국통일로 커다란 영토를 지배하게 된 신라는 685년 새로운 지방행정구역으로 9주5소경 제도를 채택하였습니다. 9주 가운데 낙동강 유역은 사벌주(상주), 삽량주(양산), 강주(진주)의 3주로 나누었습니다.3) 고려시대후삼국의 혼란기에 대구지역은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역사상 유명한 동수대전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는 태조부터 5대 경종까지 과도기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금유와 조상이라는 관리가 징수목적으로 각 지방에 파견 나오는 반자치적인 형태를 유지해왔으나, 성종 2년 때부터 중국의 관제를 바탕으로 전국을 12목으로 나누고 상주관인 목사를 내려 보내 지방의주, 군, 현 내의 향직을 감독하는 반관반민체제로 전환하였으며, 영남에는 상주목과 진주목을 두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습니다. 이어 성종 14년)에 2차 행정 대개편을 착수하고 주군의 병기몰수 및 사병금지 등의 조치로 무장해제 시켰으며 지방호족들의 권력을 말살했습니다. 이시기에 경상도는 상주지방에 영남도, 김해에 영동도, 진주에 산남도를 두었습니다. 고려 말 부산·경남지방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가 가장 심하였습니다. 이때 조정에서는 왜구의 침략을 격퇴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침략금지를 요청하는 동시에 해변의 주요지역의 군?현에 성보를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고, 종래 황폐하였던 동래읍성을 개축하게 되었습니다.4) 조선시대조선시대에는 영산강유역이 나주를 중심으로 주변 속현을 다스리는 형태를 취하였는데 이는 나주가 정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평가됩니다. 조운제도 역시 법성창과 함께 나주 영산창이 주변지역의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영산창은 영산강을 경계로 종남부의 군현들이 배속되어 있고 법성창에는 영산강의 서북부지역 군현들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창은 후기에 들어와 약간의 변동을 겪는데 나주의 영산창이 수로가 험하여 법성창에서 영산창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하였습니다.조선시대 중기에는 있었던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시는 영산강유역의 많은 군관민이 합심하여 왜적을 물리쳐 지역을 방어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조선후기에는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의 항쟁이 자주 일어났으며, 이 중 동학혁명의 발생지가 영산강 유역입니다.5) 근 · 현대시대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독점적인 지위를 갖게 된 일본은 동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내정을 실질적으로 관장하였습니다. 1906년 2월에 일본의 이사청 설치로 부산은 이사관이 부산의 일본영사와 동래감리와의 사이에 사무인계가 이루어졌습니다.갑오개혁(1894년) 때까지 대구는 경상도 감영 소재지로서 영남지방의 중추기능을 계속하여 수행해 왔고, 1895년 도(道)제도는 폐지되고 중앙에서 전국 23부를 바로 관할하게 되어 대구부 관할의 대구군으로 개칭되었으나 부청소재지로서 그 관할구역과 지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1914년에는 다시 부제를 실시했으나 시가지 일대만 대구부로 독립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달성군으로 편제되었습니다.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대구는 항일저항운동의 거점으로서의 역할 수행과 근대적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한 곳입니다. 1907년에는 대구의 서상돈, 김광제 등이 중심이 되어 일제의 침략으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금연, 금주, 절미로 되찾으려는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한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는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민족항쟁의 본거지로서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해외 귀환 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하여 급격한 인구증가가 이루어져 부산과 대구는 대도시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25동란 때에는 낙동강이 최후 방어선이 되었고 부산은 임시수도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9.28수복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대동맥 역할을 담당하여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낙동강 모식도]3. 문화영남이라는 단어는 과거 서울에서 충주를 거쳐 소백산맥의 조령을 넘어 문경, 영주로 들어서는데 조령의 령을 따서 그 남쪽을 영남이라 하였습니다. 소백산맥은 서남으로 뻗어 내려 영남지방과 중부 및 호남지방 사이에 자연적인 장벽을 이루었고 이러한 경계는 이 지역을 고립시키고 지리적 사정에 의한 지역적 현상으로 옛날부터 현재까지 방언도 그대로 남아 있게 하였습니다. 낙동강은 영남 문화의 젖줄인 동시에 한반도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으며, 낙동강으로 유입하는 각 지류의 유역마다 과거로부터 개성 있는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여 왔습니다. 낙동강 지류 유역의 역사들은 선사시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남 문화 형성에 거점이 되어 왔습니다. 고대에 낙동강의 동쪽은 고신라, 서쪽은 가야 제국의 기반이 된 지역으로서 낙동강 대·소지류 유역의 수많은 분지는 고대 가야 제국을 발달시켰고 경주 분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고대 문화는 찬란한 통일 신라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고려왕조는 중세 문화의 주축을 이루는 인재 양성의 문화력을 신라 문화에서 계승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다”라는 말과 같이 영남은 ‘인재의 부고’로서 이 지역 출신들이 정계와 학계를 주도하여 왔습니다. 낙동강은 태백 · 소백산맥에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이며, 북, 서부의 태백 · 소백산맥과 팔공산, 금오산에 둘러싸인 낙동강 상류분지는 안동, 상주, 선산 등 고읍들과 상업도시 등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금호강 유역의 대구 분지는 대구, 고령 등 역사와 문화의 중심 도시였으며, 합천 분지는 황강 유역에 위치하여 고대 대가야의 꽃을 피웠습니다. 또한 남강 유역의 진양, 함안 분지는 경남의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역사도시인 진주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분지들은 각기 개성 있는 지역 문화를 꽃피웠고 동시에 영남문화의 복합성 및 다층성을 뒷받침하였습니다.[출처] 낙동강유역조사보고서(2004, 국토교통부-한국수자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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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금강은 전라북도 장수군의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무주·금산·영동·옥천·보은·청주·대전·세종·공주·청양·논산·부여·서천을 지나 군산만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약 402km의 강입니다. 금강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하여 '호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고, 금산군에서는 '적벽강', 부여군에서는 '백마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금강의 주요 지류로는 갑천·논산천·미호천이 있고, 비옥한 호서평야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대전광역시 금강 유역에 대청댐이 있고, 하류에는 금강하구둑이 있습니다. 금강은 대전·충청권의 주요 생활·산업·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으며, 과거에는 수로 교통이 발달하여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번성하였습니다.1. 유래예로부터 금강은 비단처럼 아름답다 하여 錦江(비단강)이라 하였으며 그 물줄기를 따라 구간마다 다른 명칭으로 불리워 왔습니다. 「택리지」에 의하면 영동군 일대는 ‘심천’, 옥천군 일대는 ‘적등강’, 공주 부근을 ‘웅진강’, 그리고 그 아래를 ‘백마강’, ‘강경강’, ‘진강’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서」에는 금강을 ‘웅진강’이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의 명칭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상류로부터 ‘적등강’, ‘호강’, ‘차탄강’, ‘화인진강’, ‘말흘탄강’, ‘형각진강’으로 되어 있으며,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그리고 하류에서는 ‘고성진강’으로 되어 있습니다.영동군 일대를 흐르는 강물을 심천 또는 지푸내라 부르는데 이곳은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는 지점으로 교통의 요지입니다. 부근에 초강과 심천유원지가 있습니다. 적등진은 옥천과 영동의 중간에 위치한 나루터로 영남지방과 호서지방을 잇는 길목이며 추풍령을 넘고 금강을 건너 서울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2. 역사1) 선사시대금강의 구석기 시대 유적은 공주 석장리 유적으로 대표됩니다. 공주석장리 유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시대 유적으로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의 금강 북안에 자리합니다. 석장리 유적은 지금부터 약 13만~30만 년 전의 전기 구석기로부터 중기, 후기 구석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층이 발견되고 있어 구석기시대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금강 유역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금강유역에서 조사된 몇몇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위치한 입지조건을 보면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여겨져 왔던 바닷가나 큰 강가보다는 강을 따라 내륙 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상류지역이나 샛강 옆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유물을 보면 금강을 중심으로 터전을 잡고 살았던 당시의 사람들은 신석기시대의 비교적 늦은 시기에 이곳에 머무르면서 살림을 꾸렸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금강유역에서의 청동기 시대와 관련된 유적은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유적 또는 주거지를 비롯한 생활유적과 무덤유적 등 그 내용이 상당히 다양하고 분포지역도 폭넓게 퍼져 있습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은 금강유역에서는 물론 남한지역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의 최대 유적으로 전기와 후기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유적이며, 중서부지역에서 발생한 독특한 청동기 문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삼국시대삼한 소국의 하나로 출발한 백제가 처음에는 한강유역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다가 475년에 지금의 공주 지역인 웅진성에 새로운 국가의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웅진에 천도한 백제는 동성왕 대에 이르러 국가 중흥기틀을 마련하고, 무령왕 대에는 확실한 정치적 안정과 함께 국력 증진을 이루었습니다.무령왕을 이어 즉위한 성황이 16년에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면서 백제는 다시 한 번 중흥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비지역 천도이후 국가적 중흥을 이룬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 신라와 연합하여 한때 한강일대를 탈환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지만, 신라의 역공으로 다시 한강유역을 상실하였고 이에 보복전쟁을 하는 등 혼란을 거듭하다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백제는 멸망을 하였습니다.백제가 멸망된 후 금강유역에서는 백제의 부흥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으나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신라는 옛 백제지역과 그 지역의 주민을 포함하여 9주 5소경 체제를 마련하였고, 백제지역에는 웅천주, 완산주, 무진주 등의 3개 주가 설치되었습니다.3) 고려시대왕건의 고려건국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은 금강유역의 청주, 공주지역의 호족 세력이었습니다. 청주에서는 두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고, 공주에서는 이흔암이 궁예에 대항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려 초기에는 이 지역 출신이 중앙의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고, 중엽에는 가끔 재상의 지위에 오른 자도 있었으나 매우 드물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는데 이를 막기 위하여 금강유역의 서쪽에 수많은 읍성을 개축하였습니다. 4) 조선시대조선이 개국하면서 금강유역의 계룡산지역이 새로운 수도 후보지로 떠오르게 됩니다. 금강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북도와 충청도 일대를 관통하는 큰 강으로 공주까지 선박의 통행이 비교적 자유로운 강이었기 때문에, 금강유역의 계룡산 신도내가 강력한 후보지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금강수로의 편리함은 이후 조운제도나 조선후기 상품유통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조선의 조창은 모두 9개로서 금강유역의 각 군현의 조세는 충청도 내륙 깊숙한 지역인 황간, 영동 등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아산의 공세곶창과 용안의 덕성창에 수납되었습니다. 금강 북안의 각 군현의 세곡과 충청도 북부지방의 세곡은 아산의 공세곶창에 모아져 조운으로 한양에 옮겨졌는데, 이는 금강 수로를 이용할 경우 한양으로 통하는 해로의 중간에 위치한 안흥량의 험난함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금강 하류에 위치한 용안의 덕성창은 이러한 전라도 북부지역의 세곡이 집결되는 곳으로 본래 위치는 용안의 금두포였으나 세종 때 감세의 피포로 옮겨 성당창으로 개칭하였다가, 성종 때 다시 용안창으로 옮기고 이름을 덕성창이라 하였습니다. 덕성창은 전국의 조창 가운데 가장 많은 선축을 보유한 최대 규모의 조창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의 새곡이 금강하류에 집결되어 운송됨으로써 금강은 충청, 전라도 일대의 산물이 집결하는 유통로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여 조선후기 가장 선진적인 상업발달지역의 하나가 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금강유역은 17세기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양법의 발달, 수전 이모작의 보급, 제언 · 보 등 수리시설의 발달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진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급격히 축소·황폐화된 농경지를 확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었습니다. 금강유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많은 지류는 보의 신축과 신전개발의 주요대상지역으로 넓은 면적을 관개할 수 있는 대보가 발달하였습니다.금강유역은 국가전매의 소금과 주변유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미곡이 거래되는 중심지역이 되어 장시의 발달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앞서 나갔다. 대표적인 전주의 사탄, 강경의 강경포 등이 있습니다.5) 근대시대일제에 의해 조선이 합병되면서 공주 등 전통적 기반을 지녔던 지역들이 점차 축소되고, 금강 중하류의 중심지는 새롭게 성장하는 대전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던 기존의 문화적 기반들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습니다. 1932년 대전으로의 도청 이전은 그 같은 작업의 하나였습니다.지형 상으로 공주가 천연의 요새지로 육운과 금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하여 호서의 중심으로 오랫동안 지위를 확보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철도교통이 교통로의 간선을 이루게 되자 종래 육운의 교통로는 새로 개통된 철도의 영향 하에 흡수되어 버리고 동시에 운하 역시 토사퇴적과 철도교통의 발달로 그 중요성이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1905년 경부선 개통과 1914년 호남선 개설은 금강 중하류의 중심지를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동시켜 이 지역 전통적 기반을 해체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6) 현대시대광복 후 금강유역은 별다른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1970년대 ‘금강유역조사’를 계기로 유역의 수자원개발을 위한 기본구상이 완성되었습니다. 유역조사의 결과로 대청댐이 완공되어 대전·청주지역의 용수공급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서해안 해안지역의 논농사를 위한 삽교호·금강하구언 등의 농업용수 공급시설이 완성되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금강 상류에 용담댐을 건설하여 전주 인근지역의 생활용수 공급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습니다.1970년대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및 호남고속도로는 금강유역과 서울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으며 이로 인한 물류혁신으로 수많은 공장과 주택 등이 대규모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교통의 발달은 대전 및 전주권을 중심으로 대규모 공단을 증설하여 지역의 소득증대에도 이바지하였습니다.[금강 모식도]3. 문화금강유역은 풍요로운 문화의 젖줄이 되었고, 또한 서쪽으로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대륙과 마주하여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는데도 매우 유리하였습니다. 서해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는 한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의 문화가 해로로 연결되는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금강 유역은 농업 선진지역이었고 농업발달에 따른 생산력과 수로교통을 바탕으로 상품유통경제가 크게 발달하여 조선후기 자본주의의 발생에 있어 가장 앞선 지역의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문환경과 자연조건은 이 유역을 한국의 독특한 지역문화를 꽃피웠던 문명의 발상지이자 중심지로 자리 잡게 하였습니다.근대교통이 발달하기 이전 지역 간 물화의 교역은 육로보다는 수로에 의한 것이 더 컸습니다. 금강 유역에는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발달하여 일찍이 많은 인구가 거주하였으며 물동량도 많았습니다. 이에 따라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금강의 내륙 수운이 매우 발달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대곡창의 세곡이 금강하류에 집결되어 운송됨으로 인하여 금강은 충청, 전라도 일대의 산물이 집결하는 유통로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금강유역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하여 조선후기 가장 선진적인 상업발달지역의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18세기 이후 미곡, 면화, 면포 등이 주요한 상품으로 등장하면서 장시가 발달하자 금강유역의 공주, 청주, 강경 포구는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상업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중 강경포구는 금강유역의 대표 포구 및 원격지 교역의 창구로서 각지의 상선이 모여 교역을 행하는 대도회지로 발전하게 됩니다. 금강 수운의 이러한 기능은 개항기와 일제시대에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1899년 군산항에 개항을 계기로 대형선박의 출입이 잦아지면서 금강 수운은 상업적 이용이 크게 촉진되기도 했습니다. [출처] 금강유역조사보고서(2006, 국토교통부- 한국수자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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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한강(漢江)은 한반도 중부 지방을 동에서 서로 관통해 황해로 유입되는 한국의 주요 하천입니다. 태백산맥의 금대봉 정상부 북쪽 비탈에서 발원하여 강화해협 부근의 어귀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본류로 합니다. 《한국하천일람》 2013년 판에 따르면 본류 총연장은 약 494km으로, 압록강·두만강·낙동강에 이어 한반도에서 네 번째 긴 강입니다.현재의 한강이라는 이름은 백제가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중국식으로 한수(漢水)라 한 것이 한강으로 변한 것이라는 주장이 유력합니다. 그 외에도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되었는데,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가람'은 크고 넓은 강을 의미하는 고어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한강의 이름은 그 지역에 따라 다른 경우가 많은데, 송파부근의 한강을 송파강이라 하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강을 부르는 이름은 모든 지류를 통틀어 말하거나 양수리와 한강 하구 사이의 한강 본류를 일컫는 경우가 많습니다.한강 본류는 경기·관동·해서·호서 네 개 지방에 걸쳐 북한강·임진강을 위시한 수백 개의 지류를 거느리고 있으며, 이 지류들을 기반으로 한 수계망인 한강 수계는 한국을 지나는 모든 하천 수계망 중 두 번째로 넓은 빗물받이(35,770 km², 한반도 전체 넓이의 약 1/6)을 하고 있습니다.1. 유래한강의 이름은 본래 우리말의 큰 물줄기를 의미하는 ‘한가람’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은 ‘크다’, ‘넓다’, ‘가득하다’, ‘바르다’의 의미이며, ‘가람’은 강의 옛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한강은 크고 넓으며 가득한 물이 흘러가는 강이라는 뜻입니다. 한강은 시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중국의 한·위나라에서는 ‘대수’라 하였는데, 이는 한강과 임진강의 모습이 한반도의 허리에 띠를 두른 것과 같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고구려 광개토왕비에는 ‘아리수’로 표기되어 있으며, 백제에서는 ‘욱리하’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신라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라 불렀습니다.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한산하’ 또는 ‘북독’이라 표기하였고, 고려 때에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으로도 불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 부근의 한강을 가리켜 ‘경강’이라 불렀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강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백제가 동진과 교류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 ‘한수’라 부른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차 한수 또는 한강으로 불리게 된 것과 한강이 본래 우리말의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크고 넓다는 뜻의 우리말 ‘한’과 강의 고어인 ‘가람’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2. 역사1) 선사시대사람들이 한강에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구석기 시대부터입니다. 한강유역의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수량, 고루 발달된 샛강, 강안 좌우 언덕의 우거진 숲, 유역 주변에 서식하는 동물 등은 한강 주변에서의 주거를 가능하게 했습니다.한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지류가 잘 발달되었기 때문에, 강 유역과 하구 및 가까운 섬들은 신석기인들의 거주지로서 아주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한강은 신석기인들의 생활무대가 될 수 있었으며, 그 흔적으로 곳곳에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이 있습니다.1925년 서울의 반 이상이 잠기는 대홍수로 인해 드러난 서울 암사동 유적은 신석기시대에 한강유역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서울 암사동 유적지에서 신석기인 거주했던 20여 채의 움집터와 그 부속 시설물들이 발굴 확인되었는데 생활상은 5~10인을 한 단위로 하고 15~20여 채의 집들이 부락을 이루어 공동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한강주변에서 신석기인들의 흔적은 강원도 춘천 내평리를 비롯한 경기도 파주·고양·양주·광주·부천·시흥, 서울 암사동·응봉동, 충북 제천에 이르기까지 한강 줄기를 따라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빗살무늬토기, 망치돌, 괭이, 돌낫, 보습, 그물추 등이 다량 출토되었으며, 신석기인들은 농경과 수렵, 어로를 통해 식량을 해결하였습니다. 또한 춘천 교동에서 출토된 어구와 그물추, 한강 하류를 따라 남아있는 패총들은 한강의 어패류가 신석기인들의 식량원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 삼국시대한강유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장소입니다. 고대왕국체제가 정비되는 시기에는 영토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한강처럼 큰 강은 세력을 구축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반도에 삼국체제가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는 중국 및 일본과 교류에 유리한 위치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삼국 가운데 제일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했던 나라는 백제였습니다. 일찍이 교역활동을 통해 주변 정세에 밝았던 백제는 동진과 교류를 한 370년을 전후로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왕위계승원칙을 부자 상속의 형태로 변화시키며 왕권을 날로 강화시켰습니다. 이 일대에 자리를 잡은 백제는 남으로 마한의 영산강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는 동시에 서해와 남해로 통하는 한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중국 및 일본과 교류하면서 활동무대를 한반도 밖으로 넓혀 나가게 됩니다. 이처럼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에 제동을 건 것이 고구려입니다.고구려는 미천왕 이후 남진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려 하였고, 광개토왕 때에 이르러 백제의 관미성을 빼앗고 4세기 말 한강 이북의 여러 성을 함락시켜 ‘아리수’ 유역을 점령하였습니다. 5세기말에 이르러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하남 위례성 일대를 남평양이라 하여 고구려의 남쪽 중심거점으로 삼았습니다. 고구려는 이후 80여 년간 한강유역을 다스리며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고구려가 이처럼 남진하게 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가 백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여 551년 공동으로 북벌에 나서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을 빼앗아 백제가 하류지역을, 신라가 상류지역을 각각 차지하였는데, 불과 2년 뒤 다시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3) 고려시대고려시대 서울 지역은 초기에는 ‘양주’,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는 ‘한양’으로 불렸습니다. 983년 전국에 12목이 설치되면서 한강유역 이북은 양주목, 이남은 광주목으로 나눠졌습니다. 특히 문종 21년(1067) 양주에 서경 · 동경과 더불어 3경의 하나인 남경이 설치되어 서울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남경의 정치·경제·군사적 중요성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으며, 민심수습을 위한 지리도참사상에 일치한 남경의 역사·지리적 중요성 또한 부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참사상에 따른 길조가 나타나지 않자 남경은 약 10년 만에 폐지되고, 숙종 때 다시 재건되어 북악 아래 오늘날 청와대가 자리하고 있는 터에 연흥전 등 궁궐이 신축되었습니다.1308년 충선왕이 관계개혁에 따라 남경을 한양부로 개편하면서 단순한 지방 도시로 변모하였습니다. 따라서 한양부는 고양 · 양주 · 포천 등 현재의 한강 이북 서울 지방과 그 주변 일대만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왕의 순행과 어의 안치 등 정치적 중요성은 사라지고, 개경과 가까운 이유로 국왕의 놀이와 사냥터가 되었습니다. 후에 공민왕의 자주적 개혁정치에 따른 배원정책 실시와 관제의 환원으로서 남경이 부활되기도 하였으며, 왜구의 창궐에 따른 천도 움직임으로 한강유역 서울지방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즉 우왕 9년과 공양왕 2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6개월씩의 한양 천도에 이어 조선왕조도 한양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지리·군사·사회·경제적으로 한강을 터전으로 한 한양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4) 조선시대조선시대 한강유역의 역사·지리적 의미는 한강을 허리띠로 하고 삼각산을 진산으로 삼아 조선왕조의 도읍지를 형성하였다는 것입니다. 한강은 한반도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수륙교통이 편리한 점 등 생업의 터전이자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한강의 수운과 육로를 통해 모여든 전국의 산물은 다시 같은 경로를 통해 전국의 상권으로 흩어져 나감으로서 조선시대의 한강은 상업과 공업의 중심으로 한양의 구조가 재편성되는 기반을 제공하게 됩니다. 전국적인 조세체계가 강화되면서 조선 팔도의 사람과 산물이 한양으로 집중되고, 공물이 대량으로 운반되어 1394년 한양 천도 이후, 한강 유역은 정치와 경제생활, 그리고 사회와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습니다. 5) 근대시대조선 말기에 한강은 서양열강과 부딪치는 첫 접촉점이었습니다. 개항을 우리 근대사의 출발로 본다면 한강은 ‘근대의 문’이었던 셈입니다. 1866년 국내에 잠입해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 가운데 주교 2명, 신부 2명이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되는 일을 계기로 프랑스가 두 차례에 걸쳐 서강과 강화도에 침입한 병인양요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밀려들어온 서양열강을 비롯한 새로운 문물은 마침내 1876년 개항을 기회로 ‘근대’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한강은 그 길로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1890년경부터 용산 일대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마포 당인리 일대는 중국 세력이 진출하면서 처음에는 개시장을 통한 경제침투가 시작되었고, 또한 제국주의 침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역에는 개시장이 설치되고, 사람의 통행을 위해 1888년 한강에 증기선이 취항하였으며, 1900년대에는 전차와 철도가 놓이고, 한강에 철교가 설치되었습니다. 철교가 완성되면서 한강은 한반도의 남북을 이어주는 역할로 새롭게 부각되었으며, 이 시기가 한강의 역할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되는 시점입니다.6) 현대시대광복 후 1949년과 1963년의 서울 시역 확대로 인하여 서울특별시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 · 강북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말 유역조사를 통하여 서울의 장기발전에 중요한 계획을 미친 ‘한강종합개발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개발내용은 한강전역에 걸쳐 보다 견고한 제방을 구축하여 이를 자동차 전용도로로 하고 제방을 종전의 위치보다 안으로 들여쌓음으로써 생겨나는 넓은 하천 부지에 강변시가지를 건설하여 고층아파트를 짓는 한편 여의도 윤중제를 만들어 신도시를 조성하며, 마포와 여의도를 연결하는 제4한강교(서울대교)를 가설하여 한강의 고속화를 꾀함으로써 한강을 도시의 중심 생활권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습니다. 여의도 윤중제 공사를 그 시작으로 한 이 여의도의 개발은 서울의 남쪽 경계였던 한강을 서울의 중심부로 바꾸어 놓는 대역사였습니다. 이후 강남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서울의 면적도 두 배 이상 늘어나게 됩니다.또한 1970년대부터 한강개발이 추진되어 서울은 한강을 중심으로 균형있게 발전하게 됩니다. 1988년에는 한강변 잠실지역에서 인류의 최대 축제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2002년에는 월드컵 축구경기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세계인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었습니다. 한민족의 웅비하는 모습을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한강의 역사·지리적인 가치는 한민족의 역사 중심을 같이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이렇게 한강은 민족문화의 통합성을 바탕으로 한민족 문화의 세계로의 지향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한강 모식도]3. 문화한강은 정치·군사·사회·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생활과 풍속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한강을 이용한 교역은 각 지방의 문물이나 풍속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남한강의 지류를 통해 충청북도 지역의 문화가 유입되었으며, 북한강을 통하여 강원도의 문화가 경기도로 유입되었습니다. 또한 반대로 경기도의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기도 하였습니다. 북한강유역은 일반적으로 평야보다는 산지가 많았기 때문에 산을 개간하여 옥수수나 감자와 같은 농작물을 생산하였습니다. 북한강을 끼고 있는 이들 지역은 산세가 험하며, 강의 흐름도 빠르기 때문에 수송에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현재는 소양강댐이나 청평댐 등이 건설되어 유명한 관광지로도 이용이 되고 있습니다. 강을 이용하여 생활하던 문화는 현재 전승되는 놀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강원도 인제의 숯굽기놀이, 뗏목꾼놀이, 화천의 소금배 오는 날 등의 민속놀이는 산간지방의 자원을 이용한 생활상과 강을 이용한 문물 교류가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한강 유역이 북한강과 다른 점은 산지보다 평야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농사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먹을 것이 풍족하여 인심도 좋았습니다. 논농사를 위해서 단합된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줄다리기가 영월, 제천, 충주, 여주 등에서 많이 발달하였고, 경기도 여주와 이천에서는 거북놀이를 하면서 수확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한강은 농경생활이 정착되면서부터 제의의 대상으로 섬겨져 왔습니다. 수재, 한재 등 재앙이 닥칠 때 제의가 베풀어졌으며, 개인적으로는 집안의 우환이나, 사고나 물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 행해졌습니다. 특히 국가에서 행하는 경우에는 기우제 , 겨울에 눈이 오지 않을 경우에는 기설제를, 겨울인데도 따뜻할 경우에는 추위가 와 달라는 기한제를, 또 장마가 계속되면 날씨를 맑게 해달라는 기청제를 행하였습니다. [출처] 한강유역조사보고서(2004, 국토교통부- 한국수자원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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