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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빛을 보았는가 - 부여(扶餘), 공주(公州)

낙화암(落花巖)과 부여 정림사지(扶餘定林寺址)


부여하면 맨 처음 떠오르는 곳은 백제이 최후를 몸으로 말한 낙화암이다.나당연합군의 공격에 계백의 4천 군사는 황산벌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굴욕보다는 깨끗한 죽음을 택한 수많은 궁녀들은 대왕포 물가높은 타사암 바위위에서 치마를 뒤집어 쓰고 사자수 깊은 물에 몸을 던진다. 후에 궁녀 즉 여자를 꽃에 비유하여 이를 미화하여 붙인 이름이 낙화암이었다.1942년 절터 발굴 조사때 '정림사' 라는 글이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조각이 출토되면서 정림사라고 부르고 있는 부여 정림사지는 1979년1980년 2년에 걸쳐 절터의 전면 발굴을 실시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장방형의 '남북일탑식가람'으로 전형적인 백제시대의 가람배치였음을 알게되었다.현재 절터에서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 9호)과 고려시대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석불좌상(보물제108호)이남아있다.


낙화암(落花巖)


백마강(白馬江)

궁남지(宮南池)와 공산성


궁남지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이십여리나 끌어들였으며 못의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속에 섬을 만들어서 방장선산에 비기었다."가 쓰여 있다. 지금은 가운데 섬에 무왕의 탄생설화와 연관된 '포룡정'이란 정자가 세워져 있다.
또 공산성(일명 산성공원)은 강건너 북쪽에서 보면 마치 한자의 공(公)자와 같다 하여 공산이라 이름하였다. 성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지와 연못2개소가 발굴조사 되었으며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인조대왕이 머물렀던 쌍수정, 임진란때 승병들을 훈련시켰던 영은사를 비롯하여 백제건축양식을 볼 수있고 만하루, 진남루, 공북루 등 많은 역사 문화가 깃들여 있어 흐르는 금강물과 함께 바라보면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그밖에 송산리 고분군 등은 웅진 도읍기에 재위하였던 백제이 왕들과왕족들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1971년 우연히 발견되었던 무령왕릉은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드러내어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백제 문화 연구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또 몇해 전 발견되었던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는 승반(承盤)과 하나의 다리를 대신하여 머리를들어 올린 용을 받침으로 삼았고 그위에 산을 표현하였으며, 꼭대기에는 봉황 한마리가 서있어 외형적으로는 신선사상의 지향처인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는박산향로의 형태와 유사하다. 보존 상태나 그 세밀함 때문에 백제 유물중 가장 주목을 받고 사랑받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

물, 자연 그리고 사람 (사보), 문화재청(http://search.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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